눈 덮인 들녘 작은 둠벙에서 빨갛게 벗은 발로...
초가을 추석 전에 사 놓은 고추를 이제사 꼭지를 따고 젖은 행주로 하나하나 일일이 닦으면서 일이란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일이란 緩急이 있어서 그전 같으면 벌써 닦아서 초 가을 햇볕에 잘 말려서 방앗간에 가서 빻아서 김장까지 했겠지만 올해는 여의치가 않았다.
문득 아주 옛날 중 고등학교 시절 겨울 방학이면 찾아가곤 했던 아주 시골 나의 외갓댁이 생각이 난다.
우리 큰외삼촌 내외간은 누가 못 낳았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자손이 없었다.
그래서 여동생의 아이들인 우리가 방학에 놀러 가면은 언제나 극진히 칙사 대접을 하여 따로 먹는 밥상이라도
" 어디 우리 서울 큰 손님들 뭐 자실 반찬이나 있나 ?^^"
하고 부리부리 황소같이 크시던 눈을 크게 뜨시고 넘겨다 보시며 맛있 는 것좀 많이 해주라고 당부하곤 하셨다.
밤이면 마을에 마실을 가셨다 돌아 오시면은 꼭 "우리 귀한 손님한테 무어 밤참 대접을 해야 될텐데... "
하시면 큰외숙모께서 뒷곁 단지 속에 꽁꽁 보관했던 얼음같이 차디찬 연시를 꺼내다 주시면 따뜻한 방에서 먹던 그 맛이 얼마나 좋던지
내 평생 그렇게 맛있는 연시는 먹어 본적이 없는것 같다. 그 때는 그런게 모두 아주 귀한 시절이었다
또 같은 동리 외갓쪽 나의 친정 어머니의 사촌 남동생의 부인인 한 아주머니는 " 우리 새뱅이 잡으러가자 " 하고
좀 무료해 하는 우리를 위해 한 겨울에 버선을 벗으신 맨 발로 헌 얼개미 체를 가지고 논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둠벙에 물을 다 퍼내다 시피 하여
새뱅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민물 새우인 조금은 검회색빛 새우와 한겨울에 청천벽력 깜짝 놀라서 펄덕거리는 미꾸라지를 잡아서 이것들을 마을 논가운데
바가지로 푸는 나지막한 샘물이 넘쳐 졸졸 흐르는 물길에 티껌불을 가려 깨끗이 씻어서 무를 나박하게 썰고 고추장을 넣고 끓이면 빨갛게 색이 변한 시원하던 새뱅이국과 그 아주머니의 소박하고 따뜻한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에는 전쟁후라 살아 가기가 아주 어렵고 또 모처럼 다니러 온 우리를 즐겁게 해주시기 위해 일부러 한겨울에 그런 어려운 재미거리를 만드셨던것 같다.
그 아주머니는 육이오때 아저씨가 납치를 당하셔서 평생 홀로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수절하신 순정형 부인이시다.
지금도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나의 어린 시절 눈 덮이고 얼음이 언 들녘에서 빨갛게 벗은 발로 논두렁 사이 작은 둠벙의 어름을 깨고 새뱅이를 잡아
서울에서 온 우리를 즐겁게 해주시던 그 아주머니와 큰 외삼촌 생각에 지금도 종종 마음 한켠이 아주 따뜻해지는걸 느끼곤 한다. 05년 1월 12일 Skylar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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