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블로그

블로그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코로나-19 방역의 장기화에 따라 증가하는 자영업자들의 폐업, 청장년층의 실업 등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 심화에 대한 근본적 대책은 정부의 대규모 적자재정에 의한 재난지원금 지급보다는 IT, 5G통신 및 바이오 등 4차 산업분야에서 국내 기업 투자 및 외자유치를 통해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지가 발표한 2010/2020년 글로벌 100대 기업을 비교 분석한 결과 지난 10년 간 글로벌 100대 기업에 신규 진입한 기업은 미국의 기업(37개)중 아마존, 페이스북 등 정보기술과 바이오 신규 기업 9개, 중국의 기업(18개)중 알리바바, 텐센트 등 11개, 일본의 기업(8개)중은 소프트뱅크 등 5개이나, 한국의 기업(1개)은 삼성전자 1개 그대로여서, 한국의 신산업 규제완화를 통한 창업 기업 육성이 매우 긴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하 1938년 만주와 중국에 청과물, 건어물 수출하는 三星商會(대구)를 설립한 이병철 창업 회장은 1961. 5.16 군사정변 후 한국일보 기고문 “우리가 잘사는 길” (1963.5.31-6.5 4회 게재)에서 “일하지 않는 자들이여, 제발 일하는 사람들 발목을 잡지마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취를 위하여, 과감하게 외자와 기술을 도입하여 공업화 촉진”을 주장하여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의 기본 틀을 제시한 바 있다.

 

또한 이병철 회장은 “자본을 축적하여,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 선진국과 당당히 맞서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갈 길이다” 라며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을 밝혔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그룹의 50년 역사는 소비재에서 중화학공업, 반도체산업 등 기업 창업의 역사이며 식민지로부터 신생 독립한 대한민국의 산업화 및 경제발전 역사의 산 기록이다.

 

고 김종필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을 세계 11위 경제 강국(2015년)으로 만든 공로자로 故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회장과 故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회장을 꼽으면서, 이병철 회장은 “한번 결심하면 그 일은 틀림없이 최상으로 해 내고 마는 사람”,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부터 열까지 정밀하게 알아보고, 일본 재계의 총리로 불리던 이나야마 요시히로 게이다렌(經團連)회장의 의견까지 물어본 뒤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서면 그때야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댔다”고 증언하고 있다.

 

------------------------------------------------------------------------------------------------------------------------------------------------------------------------------

 

1970년대 말 이후 이병철 회장(1910.2.12.-1987.11.19.)이 생전 도쿄에 머물 때 늘 만나 한·일경제에 대해 토론하던 일본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長谷川慶太郞)는 40여 년 전 이병철회장이 “한·일 국력 격차는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벌어진 것이고, 한국은 반드시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고 말했다.

 

하세가와씨는 이병철 회장을 “제일모직, 제일제당, 삼성전기, 반도체, 중공업 등 전 분야에서 기술혁신을 만들어 내고, 세계 일류에 강한 집념을 보인 Innovator(혁신가)”로 평가했다. 하세가와씨는 일류기업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이병철 회장이 “ 일본 재계 인사에 요청한 것이 인재(人才)라며, 도시바, 히다치에서 많은 인재를 데려갔고, 삼성반도체도 인력, 장비, 부품, 원료를 모두 일본에 의존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호암의 사업보국의 시작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에 경남 의령군 정곡면의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병철은 1930.4월 입학한 와세다 대학 중퇴 후 귀국, 1936년(26세)에 부모로부터 받은 年收 300석 재산으로 마산에서 정미소, 운수회사를 운영하면서 은행 융자로 김해평야 전답 200만평을 매입 대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 확대로 은행 대출중단, 전답시세 폭락에 따라 부채청산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 사업 출발 이전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경영의 어려움을 깨닫고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병철은 재출발을 위한 사업을 찾아 만주, 베이징 및 칭다오 등 중국 상권을 조사한 후 1938.3.1.(28세)에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 상회」를 설립,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와 중국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시작하였다.

 

1939.3월에는 여유자금으로 일본인이 경영 대구의 “조선양조”를 매수, 김재소를 사장에 이창업과 김재명을 공장장으로 경영을 맡겨, 책임경영제를 실시했으며, 2차 대전 전시체제 중 국내불황에도 양조사업은 호황으로, 이병철은 1년 만에 대구에서 고액납세자가 되었다.

 

1945.8월 해방 후 대구양조업이 순조롭고, 한국경제가 전기 공급 부족으로 소비재 국내생산이 안되어 생활수준이 전쟁 이전의 절반으로 참담한 경제상황을 목격 후 무역이 국가적으로 급선무라 생각해 1948.11월(38세)에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였고, 오징어·한치를 수출하고 면사·강재를 수입하는 국제무역업 1년 반 만에 천우사, 대한물산, 화신산업 등 경쟁기업을 제치고 국내 무역업 랭킹 1위에 올랐다.

 

1950년 2월 일본 점령군총사령부(GHQ) 초청으로 일본 경제단(15명) 일원으로 일본 시찰하면서 호암 이병철은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과 무역이 반드시 활발해 진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호암의 제조업 결의

 

1950.6.25. 발발로 전시 인플레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부산 임시정부 피난시절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1951.1.10.)를 다시 세워 무역업을 계속하면서 1953.6월에 제일제당 창립총회에서 삼성그룹 최초의 대규모 공장인 제일제당 생산 공장을 부산 전포동에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호암을 제외한 삼성물산 임직원들은 제조업을 반대했으나, 호암은 삼설물산이 더욱 성장하기 위해 중공업 등 거대장치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암은 1953.8.1.(43세)에 신화폐 2천만환(1953.2.18. 100:1 화폐개혁)으로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 상공장관의 지지를 받고 18만$ 외화 배정을 받아 일본 제당시설 플랜트(다나카 기계시설 15만$)를 들여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일본기술자 입국이 불허되자, 일본 기술진 자문으로 국내기술자들이 일산 25톤(공장 800평) 규모의 설탕 공장 건설을 완공하였다. 1953년 설탕 수입량은 2만3,800톤으로 설탕 국내가격이 국제시세 보다 3배 비쌌으나, 설탕 생산 6개월 만에 시설을 확장, 제일제당은 3년 만에 수입대체를 달성하게 된다. (수입설탕 국내 시장점유율 : 1954 51%, 1955 27%, 1956 7%)

 

1957.10월에는 제일제당에 제분공장을 병설 건설, 공장설비 일체가 국산으로 1958.4월 준공, 밀가루 76만7,000부대를 생산하였고, 1969년에는 제일제당의 밀가루 생산은 국내 생산의 25.2%를 점유한 이후 제일제당은 조미료, 식용유, 가공제품도 생산하는 종합식품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1953.7월 한국전 휴전 후 국민 의복용 모직은 군용 모포를 이용하고, 양복은 미군 군복을 염색해 사용했으며, 질 좋은 영국제(마카오) 양복 복지는 봉급생활자 월급 3개월 치에 해당하는 6만환의 高價였다.

 

호암은 국민 의복용 복지 생산방식을 면방보다는 밀수입이 성행해 국가적으로 시급했던 모직으로 결정하고 “400년 전통의 영국 모직과 경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1954.9.15. 자본금 1천만 환으로 제일모직을 설립하였다. 대구 북부 논밭 7만평 (이후 20만평으로 확장)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일본 모방협회 다이니폰 모직기술담당 하야시 고헤이 이사에 대규모 공장 마스터 플랜을 의뢰(일본제 기계 수입 및 일본 기술자 건설 공정 감독 구상)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가 모직산업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국영기업에 의한 모직물 건설 계획에 의거 독일 함부르크의 스핀바우사에 설계 의뢰해 발주한 서독 방적기 5천추를 민영화함에 따라, 호암은 일본 플랜트를 포기하고 독일 방적기를 인수하게 된다.

 

모직공장 건설을 위해 스핀바우사 기술자 60명 초빙에 년 인건비가 30만$ 소요되자, 호암은 1955년 초 제사, 염색, 기공, 공조 등 핵심 부문 독일 기술자 4명만 초빙하고, 나머지 공정은 국내기술진으로 6개월 만에 소모(梳毛)공장 완공, 1956년 초 방포, 염색, 기공 공장을 차례로 완공하였다. 대구 시내에는 여직원 기숙사도 지었으며, 서독 방적기의 부품 소모율은 0.3%로 일제 방적기의 26%에 비해 월등한 생산성 내구성을 보여주었다.

 

제일모직 복지 가격은 영국제의 1/5 수준인 1만3천환으로 내려갔으며, 제일모직 골덴텍스는 호암 스스로 양복을 해 입었는데, 외제와 맞먹는다는 평판을 받았고, 국내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이승만 정부는 1958.1월 외국 양복지 수입을 차단하였다. 1957.10.26. 이승만 대통령 부처는 UN사령관과 함께 제일모직 대구공장을 시찰하였는데, 대통령의 국내 공장 최초 시찰행사로 기록된다.

 

제일제당 및 제일모직 경영으로 호암은 ‘거부칭호’를 받을 정도의 큰돈을 벌었고, 시중은행 주식의 절반 소유, 호남비료(45%), 한국타이어(50%), 삼척시멘트 대주주가 되었다. 제일제당 설립 2년 만에 호암은 한국 최고 부자, 삼성은 한국 최초의 재벌로 불리게 된다. 1950년 대 이후 삼성계열사가 납부하는 조세는 국가 稅수입의 4%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의 1등 기업으로 발돋움 하였다.

 

“자본을 축적하여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 선진국과 당당히 맞서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갈 길이다”고 말했던 호암의 創業정신과 기업경영에 의한 富의 축적은 당시 우리나라 기업인들에게 생산 공장 건설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4.19와 5.16이라는 정치적 격동기에 기업 활동의 위축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은 1958년 7.1%, 1959년 5.2%에서 1960년 2.3%, 1961년 2.8%로 2년 이상 저성장을 감수해야 했다. 4.19 혁명 후 삼성그룹 산하 15개 기업도 탈세혐의 조사를 받았는데, 당시 세율이 수익의 120%로 불합리 한 세제로 인해 기업인들은 탈세를 할 수 밖에 없는 시대였다.

 

이병철 회장은 5.16 군사정변 시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명되었으나, 혁명최고회의에 서한을 보내, 경제인을 부정축재자로 처벌(구속, 세금 추징과 재산몰수) 방침에 반대하고 기업인들로 하여금 공장을 지어 경제의 발전을 함으로써,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절약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구속된 기업인들을 사면토록 하였다.

1958년 나주비료공장 생산 년 6만 톤뿐이고, 1955년 ICA자금으로 건설한 충주비료공장은 거의 완성단계로 농업용 비료는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면서 연간 미국 원조자금 2억5천만$ 중 1억$ 내외를 비료수입에 쓰는 실정이었다.

 

국내 비료 수요는 1961년 30만 톤으로 예상되어 호암은 1960년 1월 경무대(청와대)를 방문, 이승만대통령을 면담 35만 톤 규모 비료공장 건설(5천만$ 소요) 구상을 밝힌 바 있으며, 1960.2 유럽차관 도입을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비료회사)를 여행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공업화 전략과 삼성전자

 

혁명정부의 부정축재 추징 벌과금은 27개 기업 379억8백만환으로 그중 삼성그룹은 103억4백만환(전체 27%)으로 납부했으며, 호암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대응, 경제계의 대정부 창구로 1961.8.16. 한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공업화 전략으로 첫째 방안(외자유치, 기간산업을 세워 수입대체 수출촉진 공업화) 과 둘째 방안(공업화에 앞서 대다수가 취업중인 농업 먼저 개발, 농촌의 구매력 증진)이 제시되었으나, 호암과 대부분 경제인들은 한국 경제 후진성 탈피를 위해 先 공업화를 지지하였다.

 

경제발전을 위한 공업화를 위해 정부는 토지명령을 시달하고, 경제인들은 정유(남궁련), 제철(이홍준,이정림), 시멘트(김성곤), 비료(이병철,정대o), 전기기기(이한원), 케이블(구인회) 공장을 건설키로 하였다,

 

호암은 1964.8.27. 한국비료공업 설립 후 1965.9월 일본정부 차관 4,390만$(삼성물산과 미쓰이 물산과 계약)를 도입, 울산에 100만평 규모 부지에 세계최대규모 단일 비료 공장(년산 36만톤)을 건설하여 1967.4.20. 준공함으로써 한국은 1967년부터 비료 수출국이 되었다.

 

호남비료공장 준공 전에 발생한 1966년 9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지분 51%를 정부에 헌납(산업은행이 최대 주주로 공기업화)후 경제계를 은퇴하면서 호암은 박정희 대통령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호암은 1년3개월 만에 다시 경영에 복귀하면서 신규 사업으로 전자사업을 하게 되는데, 1950년대부터 전자사업을 해온 금성사, 동양정밀, 대한전선 등 기존 전자업체가 반대했으나 1969.1.13. 생산제품 전량 수출 조건으로 수원 45만평 부지에 삼성전자(산요전자 보다 5만평 넓은 부지)를 설립하게 된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회고록에서 「1967년 말 중화학공업에 관심을 쏟던 박정희대통령이 “이병철 회장에게 이제 중화학공업을 해보라고 해, 임자가 가서 물어봐”라는 지시를 전하자 이병철 회장은 청와대 방문, 박대통령의 “조선, 자동차, 전자공업중 하나를 해 보십시오”라는 제안에 이 회장은 전자공업을 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정부의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77-1981)에서 기계공업과 전자산업을 축으로 년 9.2%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어 전두환 정부가 1980.12 수출용이었던 컬러 TV의 국내 판매허용하고, 1981.6 컴퓨터, 전자교환기, 반도체산업을 국책산업으로 선포함으로써 정부의 유망산업 지원정책은 삼성 등 민간기업의 기술 및 경영혁신과 함께 한국경제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호암이 선택한 마지막 사업은 반도체

 

한국 최초의 반도체회사는 통신장비 구입업체(KEMCO)를 운영하던 재미과학자 출신 강기동 박사가 1974.1.26. 생산전량 반도체 수출 조건으로 설립한 한국반도체공업주식회사인데, 당시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가 私財로 한국반도체 캠코지분 50%(나머지 50%는 미국 합작 파트너 ICII)를 인수, 운영하였고, 1978년 삼성반도체로 社名을 변경하였다.

 

냉장고, 흑백TV를 만들던 삼성전자가 일본전기회사(NEC)와 합작으로 삼성NEC(삼성SDI전신)를 설립했으며, 1978.9월 “반도체가 뭐꼬?” 하며 반도체 기술에 관심을 가진 호암과 친분이 있던 고바야시 NEC회장은 삼성전자의 NEC 반도체 공장 라인 시찰을 거절했다.

정부가 컬러TV 판매, 방송 허용 후 1980년 대 초 반도체 수입물량이 급증하게 된다. 삼성전자가 VCR과 컬러TV개발 후 가장 큰 골칫거리는 거의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는 반도체 칩이었는데, 수급이 늘 불안하여 국내 전자산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1982년 보스턴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 차 미국 체류 중 IBM, GE 반도체 생산라인을 시찰한 후 반도체사업 시작 필요성을 절감한 이건희 부회장의 설득에 호암은 73세에 반도체사업에 진출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호암은 “나라의 장래, 한국 전자산업이 지금처럼 부품조립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지금 반도체 사업을 허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어둡다”며 1982.10월 스탠포드大 전자공학 박사로 IBM근무 후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이던 이인성 박사를 영입, 1983.2월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신규사업계획서를 완성한다.

 

호암은 1983년 2월8일 도쿄에서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 “왜 우리는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며 반도체산업 투자를 발표(도쿄선언)했으며,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심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 사업보국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업이라 확신했다.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원은 반도체산업은 인구 1억 명, GNP 1만$, 내수판매 50% 이상이 가능한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며, 기술·인력이 없는 한국에선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고 삼성의 반도체사업을 반대했다 .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 제하 보고서에서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빈약한 기술 등을 제시했다.

 

1983.3.15. 호암은 “ 내 나이 73세,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어렵더라도 전력투구 하겠다”며 삼성의 반도체사업 진출을 공식 선포했다. 반도체사업에 뛰어든 지 1년 만에 64K D램을 개발했고,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 및 일본 샤프와 기술제휴를 하고 반도체 전문가인 진대제, 권오현, 황창규를 영입하였다.

1984.5월 기흥공장 1라인을 준공하고, 1987.2월 호암은 “영국은 증기관을 개발해 100년 동안 세계를 제패했다‘며 기흥공장 3라인 착공 지시 후 1987.11.29. 타계하였고, 이건희 부회장에 반도체사업 계속 당부의 유지를 남겼다.

 

기흥공장 3라인은 1987.9월 착공했으나, 반도체사업의 지속적 적자로 삼성그룹은 위기를 맞게 되며, 애플과 직거래 타진 등 성과로 1988년 삼성은 반도체에서 처음으로 흑자를 실현하는데, 이는 도쿄선언 5년 만에,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 후 14년 만에 흑자경영을 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삼성그룹, 『호암자전』, 나남, 2014.4

유귀훈, 『호암의 마지막 꿈』, 블루페가수스, 2018.1

미디어 오늘, <우리가 잘 사는 길- 호암 1963 한국일보 기고문 >, 2014.5.25.

조선일보, 선우정 특파원,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2010.2.5.

중앙일보, “한국경제의 주역 이병철, 정주영-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 2015.7.29

 


  1. 13Apr

    작은 사랑에 감사하며

    Date2021.04.13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2. 11Apr

    행운이 데굴데굴 굴러오는 하루가 되세요

    Date2021.04.11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3. 11Apr

    평화롭고 감사한 하루가 되었으면

    Date2021.04.11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4. 09Apr

    신호등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

    Date2021.04.09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5. 09Apr

    앞당겨진 미래의 일자리

    Date2021.04.09 By사무처 Reply0
    Read More
  6. 08Apr

    더 좋은날은 지금부터

    Date2021.04.08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7. 07Apr

    세월을 한탄말고, 주옥 시간에 감사

    Date2021.04.07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8. 07Apr

    동행

    Date2021.04.07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9. 06Apr

    봄을 향한 열정

    Date2021.04.06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0. 05Apr

    행운

    Date2021.04.05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1. 05Apr

    좋은 하루 좋은 시작

    Date2021.04.05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2. 02Apr

    꽃 바람, 봄 바람 당신의 가슴에도

    Date2021.04.02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3. 02Apr

    오늘도 예쁜 하루 보내세요~

    Date2021.04.02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4. 31Mar

    인생 여행길에 함께해요

    Date2021.03.31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5. 31Mar

    동행

    Date2021.03.31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6. 29Mar

    희망은 내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Date2021.03.29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7. 29Mar

    자신이 행복해야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Date2021.03.29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8. 29Mar

    힘들면 3초만 웃으세요

    Date2021.03.29 By사무처 Reply0 file
    Read More
  19. 22Mar

    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3) : 이건희 2대 회장의 新경영의 교훈

    Date2021.03.22 By정인준 Reply1
    Read More
  20. 22Mar

    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2) : 이병철 창업회장의 사업보국은 창업정신

    Date2021.03.22 By정인준 Reply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 241 Next
/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