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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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색의 길

 

1. 청산에 영원히 잘리라

- 목은의 산소와 환경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계제에 선친들의 산소도 함께 정리하고 난후 620여 년 전 돌아가신 牧隱 李穡선생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목은’은 이색의 호이다.

이색선생을 찾아보는 까닭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고려 말 뛰어난 문관이었고 숭고한 인격자이었다. 그에 관하여 고찰해 보면 우리 삶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공민왕은 물론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 왕이나 사신들도 그 이후 명태조도 “존경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색선생은 무언가 남다른 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후 태양이 따사롭게 내려쬐고 나뭇잎이 여리고 청순한 신록의 계절, 지금 그가 있는 곳을 향하여 길을 따라 찾아 나섰다. 우리 일행은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잠들어 있는 목은 이색(1328~1396)의 선영이 있는 곳인 문헌서원을 찾았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문원서원이라는 간판이 세워져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예전에는 논둑을 따라서 가는 좁은 길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길이 넓고 반듯하여지고 깔밋한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로 바뀌었다. 문원서원 입구에는 사무실 겸 관리실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한옥 호텔이 위치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건물은 예전에는 없었다. 선영으로 올라가는 길가 양쪽에는 산이 듬직하게 서 있고 그곳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그 사이로 내려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난 목은의 21대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선조 목은 이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 한 번 소풍 외에는 직접 가보지는 못하였고 다만 대단하고 훌륭한 분이이라는 막연한 기억만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있는 위치도 모르며 살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반세기가 훨씬 넘어서 그립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뵙게 된 것이다.

그의 묘 자리는 ‘무학 대사’가 정한 곳이라고 한다. 그의 무덤의 형태는 원형이며 경주의 왕릉보다는 좀 작은 봉분으로 소박하고 단순하게 되어 있다. 묘 주변이 조용하고 파란 잔디광장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도착하자 나는 초등학교 때 이곳에 소풍 온 기억이 되살아났다. “왜 이곳을 소풍지로 선정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은 우리 학급을 인도한 담임 선생님도 목은선생의 21대 후손 이었다. 그는 “목은선생의 모범적인 삶을 알려주기 위함도 있었으리라.” 묘 앞 넓은 경사진 잔디광장에서 뒹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묘 주변이 왜 이렇게 깨끗하고 넓었는지는 아랑곳 않고 그저 좋아서 재미있게 뛰어 놀기만 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어릴 적 추억은 뒤로하고 묘 주변을 살펴보니 망주석•문인상•마상의 석상들이 각각 2기씩 양쪽에 늘어서 있고 오른 쪽에 비석이 서 있다. 이들 석상들은 세월의 무상함을 증명하는 듯 온 몸에 파릇파릇 이끼가 나 있고 비는 단순한 형태로 작고 소박하며 앞면에 牧隱先生李穡之墓 라고 새겨져 있었다. 부친을 장례지낸 목은의 계자 ‘종선’도 목은의 영구 앞에 묻혀 있어 위아래로 쌍분을 이루고 있었다. 묘에서 5~6십 미터 쯤 떨어져서 큰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사방으로 뺑뺑 돌아 서있고 묘 전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데 100 미터 이상 길게 가림이 없어 탁 트였고 아스라하게 보였다. 좀 거대한 느낌을 받은 듯하여 이게 이색선생의 본연의 뜻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곳은 기린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주변이 기린 모양을 하고 있어 기린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영수靈獸로서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평화로운 지명이라 하여 그곳에 장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목은과 관련된 부속 건물들도 여러 채 세워져 있었다.

 

2. 죽순이 자라서

- 목은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임금의 신뢰와 사랑

길은 곧은길이 있고 굽은 길이 있다. 곧은길은 대나무처럼 바른 길이고 이 길은 앞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正道라고 말한다. 반면에 굽은 길은 변칙과 반칙으로 억지를 부리는 길이고 전망이 불투명하여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어두운 길이다.

과연 목은선생은 어떤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을까?

그는 성장하면서 잦은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원나라의 정복으로 물건의 토색과 정신적 압박을 받고 왜구의 잦은 침입 그리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국내정치가 어수선하고 나라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현재 이색으로서는 이러한 혼미를 헤쳐 나가는 길은 오직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할 힘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공부와 연구에 열중했을 것이다.

 

이색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시대에 부친 ‘이곡’과 엄하고 자애가 깊은 모친 함창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원나라와 고려에 고위관료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이색은 스스로 山寺에 들어가 독서를 하였다. 14세 때에 ‘진사시험’(成均試 十韻試科)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진사는 생원으로 양반선비라 불렀다. 이후에도 계속 명산에 들어가, “목은에게 산은 인적이 조용하고 한적하여서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기질을 바꿔줄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러 명산을 찾아가 그곳에서 공부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20세에 원나라 북경에 유학을 떠나 주자학을 공부하고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의 길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3세에 귀국하여 국정을 맡아보고 26세에 장원급제하면서부터 나라의 대정에 참여하며 나라의 큰 일이 있으면 임금은 중신인 목은에게 물어서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23세에 知禮部事(교육부장관)를 비롯하여 지병부사(국방부장관)•지공부사(옛 상공부장관?)•문하시중(국무총리) 그 외 외교서기관•성균관대사성•藝文春秋館事•예문관대제학•문무를 관리하는 병부랑중 등 20여 년간 많은 고위 관직을 맡았다. 또한 중국(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그의 고향인 한산이 천하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귀국하여서는 한산의 좋은 경치를 시로 나타내는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한산모시’로 만든 옷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있다면 한산에 모시로 유명한 곳이라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어 교역의 길을 텄을 것이다.

 

여러 관직을 맡았다는 것은 국왕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예우를 받은 증거임을 알 수 있고 지예부사를 맡아서는 공민왕에게 홍범을 강의 하는 일도 하였다고 하니 그의 지혜가 탁월함을 추측할 수 있다..

 

그가 걸어가는 길에는 평탄한 길만 만난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횡포로 백성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는 위태로운 세상이었다. 홍건적이 침입하여 공민왕은 복주로 피난 갔는데 대신들은 각자 도망갔으나 이색은 끝까지 남아서 임금을 호종하였다. 목은선생은 25세 되든 해 1352년(공민왕1)에 신념을 갖고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들을 제시하였다. 그 정책안들은 다음과 같다. “제대로 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국가 건설의 성공의 기반으로 보고, 개인공부에 의존하던 교육을 학당과 향교를 두어 인재를 육성하고 성균관에 우수한 자를 선발해서 임관 수직하는 교육진흥에 힘썼다.”

 

그리고 “공정한 경제와 법질서 없이는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면 모든 백성이 자유롭고 안정된 환경에서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부패한 권세가들의 농민 토지 수탈로 농민이 재산권을 보호 받지 못하고 그들의 삶이 어려워져 실망한 백성들을 위한 전제개혁을 단행할 것을 상소하고,” 또 고려 말에 “왜구의 출현으로 마을과 주민들이 방화•약탈•살인 등을 당하여 풍지박살이 일어나고, 문무관의 구별이 문란하여 군인의 제 역할을 강조하고, 차후에 이성계 같은 사람이 나타나 왕권을 찬탈하여 폐해가 있어 군인 정치의 관여를 막으려 하였다.”,

특히 “그는 불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도첩제를 발급하고 놀고먹는 중이 없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그는 원나라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후 대사성이 되어 불교 사회이던 고려에 성리학을 소개하고 보급하여, 불교의 폐단으로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도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특히 전제개혁 문제 등은 권문세가들의 반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목은선생이 당시의 시폐를 통찰하고 시행할 것을 통절하게 말한 것”이라고 본다.

 

3. 푸르른 소나무

- 목은의 직언과 변함없는 임금에 대한 충성과 사랑

목은 이색은 왕에 의한 신임을 받기도 하였지만 올바른 일이 아니면 임금에게도 직언을 하고 왕을 설득시키는 반면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공민왕(14년)은 단명한 왕비 노국공주의 영정사진 안치를 위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화려한 절을 짓는 문제로 그러지 말라는 시중 유탁의 올바른 상소에 죄목을 알리는 유중문諭衆文을 지으라는 하명에 목은은 무슨 죄로 죽이는가 물었다. 왕이 말하기를 “수상으로서 불의를 행하여 가뭄이 오게 한 일, 연복사의 토지를 빼앗은 일, 노국공주의 제사에 불참하거나 장사의 예를 어긴 일 등 불충과 불의한 네 가지 죄를 말하니” 목은은 이에 대답하되 “네 가지 죄는 여론도 그러할 것이고 죽일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목은은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고 목은 또한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목은은 바르지 못한 일은 기탄없이 임금에게 直言을 하여 고려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감옥에 가는 일까지 있었다.

 

왕의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슬이 시퍼런 시대에 왕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구나 쓴소리로 대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목은은 바른 말을 말하고 왕을 설득하여 감동하게까지 하였다. “목은은 이치에 어긋나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요즘은 어떨까 시대와 환경이 달라졌음에도 최고 권력자에게 쓴소리하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다. 다만 작금에야 살아있는 권력에 우회적으로 반기를 드는 경우는 더러 보게 된다. 앞으로 그런 사람을 보기를 희망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요구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이 더욱 성이 나서 재촉하여 “국새를 봉하여 이를 가져가 더 덕이 많은 사람을 섬기라”며 식음을 전폐하고 노심초사하는지라 이색은 “임금의 총애에 대한 보답하는 일로 임금의 뉘우침과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아니하도록 말하면서” 눈물이 비 오 듯하였다. “내가 눈물이 나는 것은 죽음을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로 인하여 상감님이 온 천하와 후일 세상에서 좋지 못한 말을 들을 까봐서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獄官이 이 사유를 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느끼고 깨달았다”고 한다. 탁을 석방하고 목은은 목욕하고 조의에 들어오라고 하여 왕은 “자신의 성냄을 혐의치 말라 하고 다시 마음을 다하여 도와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아도 “목은선생은 임금을 위하는 충성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목은은 중간에 변심하지 않고 ‘늘 푸르른 소나무’ 같은 길을 걸어가는 생활을 하여 성품이 곧은 사람임을 알게 한 것이 되었다.

 

4. 탐욕도 벗어놓고 말없이 살라하네

- 목은의 숭고한 인격

이색초상은 관복차림으로 그려진 영모영당본이 전해진다. 초상을 보니 한 눈에 인자한 모습이 느껴진다. 초상화만으로 사람의 마음 즉, 인품이 어떻다고 말하여 속단하기는 어려움이 있지만 영정에 나타난 용모나 자태에서 풍기는 느낌으로 말할 수 있다. 목은선행은 따뜻하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모습으로 내 눈에는 비쳤다.

목은선생은 “학문이 해박하고 마음이 인자하고 너그럽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이었지만, 사람을 대할 때에는 겸손과 예도로 대하고 위엄도 있었다.”고 한다. “목은은 성낸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고, 또 빨리 말을 하거나 황급한 태도가 전연 없어 보였고, 꾸지람을 할 때는 반드시 천천히 이치로서 타일러서 해득”하게 하였다. 그래서 평생 말과 행동이 조용하고, 모 나는 생활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믿고 의지하던 친구가 왕권을 찬탈簒奪하려고 가진 苦楚와 형벌을 당하게 하는 역경에도 태연자약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니 보통 사람과는 다름을 인정할 수가 있었다.

 

목은선생은 “문하시중이 되어도 청빈한 생활을 하여 탐관오리들에게 師表가 되었고, 평생 고관대작의 자리를 영광의 자리로 보지 않았고, 또 영어囹圄와 형벌이 명예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정의 가난과 불운이 그의 正道를 훼손시키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아서 “목은선생은 위대하고 숭고한 인격을 지니고 신뢰받는 사람으로 평을 받았다”고 한다.

 

공민왕조차도 “목은은 그 도덕이 시속선비들에게 비할 사람이 아니고 또 학문도 골수와 같아서 중국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문 것이니 내가 어찌 교만하게 대접할 수 있는가.” 라며 목은에게 각별한 예우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학자들 간에도 이색은 존경받는 선지자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민왕을 비롯한 공민왕 사후 우왕과 창왕도 “목은의 인품과 문장이 훌륭함을 인정하여 중신으로 대우하였고,” 중국사신(장부와 주탁)도 “목은은 도덕적인 사람이라며 존경하였다.”고 하니 이처럼 세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사를 돌볼 수 있었다는 것은 목은의 인품과 재능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후대에 거울이 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다. 본관이 어디냐 즉 어디 이 씨냐 그러면 한산 이 씨라고 답하곤 하였다. 그때 한산 이 씨는 ‘양반’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당시는 왜 양반이라고 말할까하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부끄럽지만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이는 아마도 “목은 이색의 인품에서 연유하여 아랫대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말을 듣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그의 수범은 많은 수양과 노력으로 체득되어야 한다고 본다.

 

5. 매화가 피는 곳에

- 목은에 의한 창왕 즉위 및 문하시중 등용 그리고 이성계의 쿠데타

목은과 이성계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이들의 우정은 공민왕이 각각 재능을 알아주어 한사람은 ‘문장’으로 대접을 해주고 또 한사람은 ‘무장’으로 대접을 해줘 이들이 친구로 맺는데 영양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그에 맞는 대접을 해준 것이 둘이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되어 이들 둘은 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고 본다. 더욱이 이성계는 목은을 존경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李成桂는 목은에게 자와 호를 지어달라고 청하였고, 자식의 이름도 부탁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목은은 쾌락하고 “桂花는 仲秋 가을에 희고 깨끗하게 피는 것이니 字는 仲潔이라고 하고 또 桂樹나무의 짝은 솔만한 것이 없고 또 소나무는 그대가 節義를 尊尙하는 의미에서 매우 좋아하니 室號는 松軒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또 二男의 이름은 芳果라고 하라고 하였다. 그것은 三男의 이름이 방의芳毅이기 때문에 과의果毅는 ‘붙은문자’로 무장의 필수 덕목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성계의 자와 호 그리고 아들의 이름이 그렇게 해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 둘의 우정은 깊었음을 알 수 있고 목은의 학문 또한 대단한 위치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야심과 권력욕이 가득했던 이성계 장군은 우왕의 방탕한 생활과 왜구의 잦은 침입과 대신들의 뇌물을 받아 나라 기강이 문란하여 이런 나라 상황에 약점을 노리고 위화도 회군 후에 그의 상관인 최영을 죽이고 지도자를 믿을 수 없다고 그를 혐오하고 마침내는 우왕을 폐위시키는 무법한 일을 자행하였다. 최영장군은 귀찮고 진절머리 날 정도의 수많은 왜구의 침공과 약탈과 피해에 대항하여 격퇴하는 과정에 이성계장군과 함께한 전쟁영웅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다. 이성계는 총사령관이자 전공을 세운 당대의 최고의 명장을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것은 권력쟁취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점에 이성계에게 협조하지 않았다고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목은선생은 이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걸어갔다. “어떠한 유혹이 들어와도 어떠한 역경에도 그는 바른 길을 걸어갔다.“ 즉 그는 바른 길을 누가 구부려 놓아도 바른 길로 가는 성품이었다. 이때 백성들은 두려워했을 것이고 이런 無所不爲의 정치현상을 타개할 위인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이성계 장군도 무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면서 특히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하여 무공을 세우는 등 바른 길을 걸어갔다. 비록 무관으로서 가는 바른 길이 얼마나 길고 짧은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굽은 길을 더 굽혀 자기편에 선 사람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목은은 왕씨의 왕권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하여 전왕의 아들 창왕을 제의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목은은 유배지 장단에서 입궐하여 ‘문하시중’에 오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색과 이성계의 우정에 금이 가게 되었다.” 이후 결국 이성계는 또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켜 창왕을 강화로 내쫓고 자기 말을 잘 듣는 왕요를 왕위에 즉위시켰다. 여기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사이였는데 중요한 국가 일에 대하여 서로 의견이 심하게 대립하게 되고 “어떤 면에서 보면 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은은 그 길을 가기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너를, 우리를,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분명 마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시대적인 인물이 되기 쉽다. 언제 어디서나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내린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오르지 정도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정도를 걸어가면서 반칙하는 사람을 만나면 거기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른 길로 안내하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반면에 굽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더 그 길을 굽히려고 모의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기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목은이 문하시중 등 고위관직에 오르는데 포은圃隱 鄭夢周의 제의도 있었다. 그는 목은의 제자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친구처럼 지내면서, “목은은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좋은 선비이고, 장차 나라의 큰일을 할 사람으로 보고, 그를 치켜세우고 임금에게 간청하였다”고 한다.

포은이 이렇게 한 것은 人心을 안정시키고 王氏王權을 간위하려고 한 것으로 들어나 “이방원 일파의 지극한 반심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목은은 올바른 나라 건설의 꿈을 안고 공민왕이 서거한 후 명태조의 왕이나 대신의 입조요구에 어린 창왕과 다른 대신들이 이색은 고령이므로 못 간다고 하여도 오히려 그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육십 노인인 자기가 나라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떠났다. 그 이면에는 “이성계 장군의 우왕을 내쫓는 등 그의 횡포를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명태조에게 이성계 장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王官監國을 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명태조는 어려운 국내사정 등으로 말없이 거절했다고 하고 다만 목은을 소중하게 대우하고 갈 때에는 목은선생의 태도를 연모하였다고 한다.

 

6. 구름이 머흐레라

- 목은의 正道와 이성계와 그 일파의 역성혁명

이색은 이성계 일파의 음모와 모함으로 여러 차례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면서 이색은 왕에 대한 지조와 왕씨 왕권의 정통성을 지키며 길을 잃은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 사실이 발견된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왕씨 왕권과 이씨 왕권의 경계선 언저리를 헤매며 살았는가. 그의 삶의 길은 이성계 일파의 강렬하고 공격적인 정치판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무겁고 힘든 때가 많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현재 있는 자리에서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이색의 길로 살아가기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목은선생은 조선 창건과 관련하여 자신은 물론 자식의 불운으로 외롭고 괴로운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굉장히 가슴 아픈 생활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목은은 박해생활 가운데서도 그의 바른 길을 잃지 않았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갔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의 고충을 털어놓는 시에서 그의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년에 맏자식이 죽더니/ 금년에 둘째 자식이 바닷가 골로 귀양 가네./ 셋째 놈이 또 탄핵을 받았다 하니/ 아이고 하나님 이게 웬 일인고/ 세간의 영화와 질고는 순환하는 것 같고/ 소나무는 푸르렀으나 찬 기운에 떠네./ 仲尼께서 九卦를 버리고 점치던 일을 배워보니/ 흰 머리신세가 장단으로 가라네.

 

나는 목은선생의 이런 자탄시를 접하면서 그는 참으로 인내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또한 혼란스러운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언짢고 어디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목은은 질고와 영화는 순환한다는 시 구절에 잠시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장단은 그가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이러한 탄압은 계속 이어졌다.

 

이방원은 자기가 하는 일이 옳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이 있어서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을 처단하였다. 그렇기에 나라의 훌륭한 인재를 잃는다는 점을 과소평가하여 괘념하지 않고 그 표적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 역성혁명에 강력한 반대자인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목은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이 일을 안 이성계는 오히려 포은 일파가 교사한 짓이라고 뒤집어씌우는 위선을 말하였다. 이런 변신에 목은은 “겉이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라는 시 구절을 생각하며 시와 문장으로 아픈 가슴을 녹이며 스스로 위로해 가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런 시기가 오히려 분노보다는 자기를 단련시키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숙고의 시간이었을 것이고, 좋은 삶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의 희망적인 나라를 꿈꿔 보기도 했겠지만,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정몽주•정도전•권근•이숭인•하륜 등이 이색 선생의 제자였다. 온건한 목은•길재 등은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들 가운데 혁명참여에 강경한 목은의 제자이기도 한 정도전•하륜•권근 등이 새로 등장한 이성계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권과 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반대파들을 축출하고 마침내 그가 옹립한 王瑤를 恭讓王이라고 칭하여 왕위에서 내쫓아 버리고 이성계 장군은 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1392년 7월에 ‘李氏朝鮮을 創建’하였다.

 

이색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한 협조를 떠나서 이는 심히 ‘슬프고 부끄러운 일’로서 그의 깊은 신념하에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절실한 심정으로 正道를 말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이를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는 이색이 왜 그런 짓을 하였느냐고 이성계에게 묻는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답을 하였을까? “아마도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외세의 등쌀과 국내의 불안’한 현실 때문”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을까? 그리고 떳떳한 눈길을 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장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지키는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기서 목은은 “비판 대상을 개인 이성계나 그 세력에 대한 외면보다는 그의 내면인 시대의 불의한 정치상황에 대한 오판과 부당한 정책의 내용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충고내지는 바른 말을 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이성계는 이색의 생각과 행위를 교정하겠다는 마음으로 대화나 행동을 시도했다면 이것은 평생 양자 간의 갈등과 경쟁문제를 풀어가지 못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유능한 지도자는 백성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읽고 이를 기반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겸손하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색은 조직도 없고 돈도 없고 세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망국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일념으로 백성의 자유와 가난의 탈피와 개방을 중시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반대 위치에 선 “이성계는 오랜 확신에 찬 신념으로 해결해야할 ‘사회경제적 혼란과 시대 변화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신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외려 그들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나라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또한 그들의 표현과 신체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색은 백성들의 안전한 생활과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고 나라와 백성의 살림이 어려운데 정치권력의 쟁취에만 몰두하고 있어서 ‘슬프고’ 이러한 상황이 대외에 알려지게 되어 ‘부끄럽다’고 주장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로서는 백성의 안전과 자유를 침범한 위협세력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도덕성이 높아지게 되고 민심이 떠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 기회로 “이색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질투하였을 지도 모른다.” 이성계는 이색을 두려움의 존재로 여겨 그 가문까지 간섭을 하여 이색은 물론 그 자식을 귀양 보내고 죽이는 일까지 자행하였다. 이성계는 이색을 더 이상 경계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어려운 시대 상황일수록 개방적인 자세로 목은과 연대하여 나라를 이끌어가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여야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목은에 대한 설득과 타당성을 찾아야 했다. 특히 이 둘은 정치•외교•경제적 문제는 물론 정서적 차이로 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성계로서는 조선의 전쟁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민생의 회복과 대외관계에서 안정을 되찾아서 자신이 다스리는 왕권을 공고히 하고 태평성대의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성계는 체제유지를 염두에 두지 말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색과 대화와 협력을 통하여 소통을 충분히 하여야 했다. 이색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집권한 정통성의 부당성을 말하지 못할 만큼 소극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애국애족 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이색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절박하고 넓은 마음으로 소통 또는 토론을 하여 상대방의 생각의 깊이를 알고 공감대를 형성해서 서로 협력하여 나라 일을 조정해 가는 것이 서로 다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게 그때나 지금이나 민심과 여론의 생각이 아닐까 이 바탕위에서 큰 정치와 큰 인물이 나오는 것일 것이다. 더불어서 이것이 공생하는 길이고 행복해지는 길일 것이다.

 

나는 목은의 ‘慨世歌’라는 시조에서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고 고려를 지키려는 憂國之士의 마음으로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을 분개 하는 개세가라는 그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여기서 구름은 역성혁명을 하려는 강경파인 신흥사대부들을, 매화는 고려를 지키려 나라 일을 근심하는 이색자신과 그 외 온건파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일로 인해 “목은선생은 여주 귀양살이에서 白衣草笠으로 상복을 입고 글을 쓰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혁명시기 이므로 목은을 죽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태조는 목은의 충성과 기타 다른 모함도 다 잘 아는지라 특별히 살려서 장흥부로 귀양을 가게 하였다. “목은의 둘째 아들 종학이는 장사로 귀양가는 도중 후일 태종이 되는 이방원의 일파에 의하여 32세로 목매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목은의 나이 65세이던 10월에 목은 선생은 사면을 받아 한산으로 돌아왔다. 그 후 가슴 아픈 생활로 삼년동안 두문불출하고 한산에 있다가 68세 5월에 여강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의 답답하고 무거운 심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그때 산 속 깊숙이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을 하고 나오면서 이때의 답답한 심정을 나타내는 그의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리가 없으면 내 가슴이 갑갑하고/ 소리가 나면 남의 귀에 들린다./ 두 가지 생각이 다 못쓰겠으니/ 깊은 산속에 들어/ 우는 것만 같지 못하네./ 창자가 끊어지고 눈이 길이 마른다./ 꿈속인들 이런 일을 보았을까 라고 시를 읊고 “오늘은 내 가슴이 조금 시원하다”하고 동행한 문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7. 석양에 홀로 서서

- 목은의 관직 거부와 외로운 길

목은은 69세 봄에 이태조가 만나기를 원하여 서울로 와 그의 곡진한 관직제의에 목은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亡國의 사대부는 오르지 해골을 故山에 묻힐 뿐”이라며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는 아마도 자기를 지지한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 주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색은 가는 길이 험난하고 좁더라도 구태여 그 길을 고집하여 걸어갔다. 무난하고 넓은 길도 있지만 그 길을 일부러 피하여 걸어갔다. 무난하고 넓은 길은 높은 지위에서 직책을 수행하면서 일시적으로 편안하고 풍성한 생활을 하겠지만 그는 그것을 마다하고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이성계 추대를 지지한 ‘이직’을 언뜻 머리에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는 이성계의 개국공신의 칭호를 받아서 그에 따른 하사품이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星山君이라는 작위까지 받고 나중에는 이방원을 도운 일로는 좌명공신이 되고 세종 때에는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목은 선생은 이미 공민왕으로부터 대광한산군大匡韓山君 또 우왕 때에는 三重大匡韓山君이라는 功臣號를 받고 관작官爵을 더하여 주어 우대받은 적이 있음을 상기시켜 볼 때 그것에 욕심을 낼 사람은 아니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오직 바른 길만을 고집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길을 가는데 누가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갔다. 물론 화려한 길로 유혹하면 그 길로 갈 법도 한데, 이게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드는데 그는 여기에 현혹되지 않고 ‘독특한 길’을 걸어갔다.

 

‘독특한 길’은 그만의 독불장군의 길이 아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남보다 좀 다른 점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즉, 예의 있고 법도가 있고 질서가 있고 양심이 있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윗사람이나 동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고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 또한 윗사람을 존경하고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예의로 대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존경한다’는 것은 임금인 경우에는 그에게 충성하는 것이 되고, 나라와 국민, 그 당시 백성들에게는 사랑한다는 경우가 되고,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경우가 된다. 반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변칙과 반칙을 하는 사람에게 그렇고,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그렇고, 이를 달리 보면 그런 사람의 삶이 ‘미성숙하다’는 말로 바꾸어 볼 수도 있겠다. 그는 진정 백성과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생활이 더 나아지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온 사람이었다. 여기에 남달리 많은 관심을 갖은 사람이었다. 오르지 그 길을 가기 위하여 그는 불의와 맞서서 정도로 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든 국민(백성)이 그의 바른 행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역사에서 그를 잊지 못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 이색을 거울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이색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정도전은 목은의 태조 앞에 무례함에 분노하여 그를 참형에 처할 것을 고하였다”고 한다. 다행이도 “이태조는 손 사례를 치며 다시는 말하지 말라하고 거부의사를 표시하였다”고 전해진다. 만약에 벼슬제의를 승낙하고 지예부사나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노련한 지도자의 지혜를 발휘하여 즉 “교육자로서 이성계와 그 아들을 교육하여 더 좋은 나라 더 발전하는 나라를 만드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더라면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더 훌륭한 이색이 되지 아니하였을까” 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들면서 이점 이색의 실책이 아닌가하는 일말의 생각이 든다.

 

그럼 왜 그렇게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색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생각을 못했을까 아니면 그렇게 하고자하는 용기가 부족했을까 아마도 그 당시 정치 분위기가 대단히 어렵게 돌아가고 있어서 아예 정치에서 손을 땠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근본이유가 있었을까 정치에 신물이 나서 그랬을까 모를 일이나 다만 추측해 보건데 고려 공민왕과의 관계에서는 그런 감정과 생각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서로 존경하고 예우하였다, 우왕•창왕 시절에는 그럴 정도로 한 자리에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다. 다만 이성계의 영향 하에 있는 왕의 측근들과 대신들의 끈질긴 공격과 알력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생각건대 왕을 찬탈하고 조선왕조를 창건한 사람에게는 나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못마땅하고 미워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목은은 그 해 5월(69세)에 여주 신륵사로 가게 되는데 그곳은 공민왕의 國師였던 고승인 나옹懶翁이 거처했던 곳이고 선친 가정稼亭의 유지에 따라 장경각藏經閣에 通文을 지어준 곳이고 공민왕의 명에 따라 나옹 禪師 사리탑명舍利塔銘을 지여준 곳이기도 하고 경치가 좋은 곳이어서 찾아가곤 했다”고 한다. 나옹은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시 가운데에 이런 시가 전해진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한 많은 과거 서러운 사연 훌훌 털어버리고/ 미운 정 고운 정 뒤돌아보지 말고/ 물같이 바다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목은의 삶을 뒤돌아 보건데 목은은 이 시를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신륵사에 오르지 않았을까? 즉 그의 삶에서 분노와 증오를 다 내려놓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지내지 아니하였을까 생각이 들었다.

 

목은의 인격과 문장에 공민왕도 예우하였고 원나라 왕도 인정하고 지극한 대접을 하였다고 했다. 목은은 충효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모친의 상에 슬픔 가운데 삼년상을 치르면서 병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여 전제개혁과 교육진흥, 문무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왕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왕씨 왕권을 유지해 오는 등 국방개혁에 힘쓰고 불교의 폐단을 없애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공민왕에 대하여 바른 말을 말하고 때로는 눈물로 임금을 감동시키고 홍건적의 난 때 임금과 함께 福州(지금의 안동군)로 피난하여 호종을 하고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 하였다.

 

이와 같은 인물이 만약 이태조의 관직 제의에 수락했다면 무엇보다도 이태조 정권의 왕권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즉 이씨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절함으로 왕권의 체면유지를 인정받지 못한 느낌을 받는데 대한 섭섭함으로 인하여 이방원의 목은에 대한 독배를 자행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원이 이색 묘를 파묘해서 지석을 폐기한 것은 왕씨 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이조의 찬탈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흔적을 지우는 행위였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이색은 야인으로 돌아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갔다고 볼 수 있다. 차후 왕위에 오를 이방원에 대한 관심과 관여는 떠나 있어서 이방원으로서는 권력쟁취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왜 그는 이색에게 독배를 들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목은선생의 지나온 행적을 보건데 미래의 자기 왕권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열등의식의 발로인 것으로 추측이 되고 선대의 왕조를 이어받아 자신의 시대로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이태조 왕권에 대한 불만과 동조하지 않는 태도에 괘씸함과 미움도 작용한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아닌가하고 겸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다.

 

8. 물같이 바다같이 살다 가라하네

- 上善若水 같이 살다 가다

이색선생은 그의 삶에서 남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더욱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갔다고 볼 수 있다.

여강벽난도에서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경기감사가 쫓아와 ‘이태조가 보낸 술’이라며 선온례宣醞禮를 행하려 왔다”고 하였다. 목은은 이태조가 보냈다는 술을 마시려고 할 때에 같이 탔던 “신륵사 중이 그 술은 잡수시지 않는 것이 좋다”며 만류하였다. 목은은 손을 들어 내두르며 “죽고 사는 것이 명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 하고 술병마개를 하였던 竹葉을 빼어들고 “내가 만일 충성이 있다면 이 댓잎이 살 것이요. 없다면 죽을 것이다.”하고 그 댓잎을 강에 던지고 술을 마시자 갑자기 舟中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고 하는 우리에게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목은 관련 서적을 통하여 접하게 되었다.

 

이태조가 부고를 듣고 경기감사를 불러 물은즉 태종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가 보낸 술인 것임이 판명되었다. 이태조는 화가 났으나 이방원은 혈육이고 사실상 실권이 있는 자이고 즉, 목은 시해 2년 후에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도전을 숙청하는 등 태종 즉위 전부터 실권을 쥐고 있는 이방원의 세력에 밀린 것인지 역사는 알고 있을 것이다. 정도전은 개국공신으로 정치에 실권을 쥐고 있는 가까운 측근이므로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고 경기감사만 왕명위조죄로 참형에 처하였다.

 

이태조는 친구인 목은이 시해되자 범죄에 가담한 자 중에 몸통은 제외하고 꼬리만 자르는 식의 처형을 하였다. 즉 이태조의 5남 이방원(후에 조선의 3대 임금이 됨)의 명을 받아 정도전이가 보낸 술이었는데 이방원과 정도전은 죄를 묻지 않고 심부름을 한 경기감사만 왕명위조죄로 참형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통렬한 반성 없이 목은에게 사후 음식과 부의금을 후하게 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은 혹시 “이색의 죽음을 거룩한 정치적 희생으로 여겨서 그런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이태조는 이색의 시해에 주범 역할을 한 이방원과 정도전을 처단하지 않은 것은 간접적으로 그 죄에 관여했다는 정당함을 인정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성계•이방원은 적어도 최영•정몽주•이색 앞에서는 떳떳하게 서 있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정치권력 확보를 위해서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한 그들은 ‘진실의 지배’ 앞에 그들의 영혼이 가슴을 죄고 있을지 모른다. 이성계나 그 아들 이방원은 권력을 쟁취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취급하였다. 지금도 이들은 칼을 휘두르고 평정된 마음에 괴로움과 고통을 가슴에 안고 지하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양심의 가책’이 죽어서도 따라다닐 줄은 예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억압과 고통을 감내하며 진실의 길 위에 걸어간 자들은 슬픔과 아픔과 미움을 땅에 묻고 영원히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나라와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느냐는 점에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상대방의 힘의 약함에 기대어 이를 이용한 자로 그 동안 일부 인정받았던 존경과 권위를 상실한 자가 승자일까?” 아니면 “저주기를 각오하고 자기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희생당한 이가 바로 역사의 승자일까?” 이러한 현실이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바라보며 관심 있는 자들은 후자에 더 많은 동감을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사람에게 평안하고 행복한 길을 걸어갈 것을 뒤에서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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