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남단 키웨스트 섬에서 만난 기아자동차 로고는 연민이자 감동이었다. 인구 3만 명의 이 조그만 지역에서 몇 대나 판다고 이 먼 곳까지 왔을까, 연민이었다. 그런데 도로 위를 달리는 기아차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감동이었다. 이렇게 해서 현대기아차는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가 됐구나,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의선이 소환한 역사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다. 김철호의 기아차는 현대, 대우, 쌍용 등 자신보다 덩치가 큰 대기업과 늘 경쟁했다. 그래서 혁신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한국 최초의 컨버터블 로드스터 ‘엘란’이나 세계 최초의 도심형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 ‘스포티지’처럼 끊임없이 두드리고 도전했다. 대기업과의 경쟁은 가혹했으되 그로 인해 혁신은 끊임없이 이뤄졌다. 차별도 받았다. 전두환 정부 때는 아예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했다. 강제적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 때문이었다. 그러자 승합차 ‘봉고’를 개발해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이 또한 혁신의 선물이었다.
정의선 회장은 청운동 정주영 회장 자택에서 밥상머리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2018년 수석부회장에 오른 뒤에도 정문과 로비로 출근하지 않았다. 1층은 아버지가 다니는 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면서 아버지를 따랐다. 그러나 항상 정장을 차려입었던 아버지와 달리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짧은 머리 모양으로 신차 발표회에 나오기도 했다. 변화의 메시지였다. 디자인 경영과 파격 보증 프로그램은 다름 아닌 변화의 실행이었다. 현대·기아차는 이를 통해 위기를 이겨내고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새해 벽두부터 현대자동차그룹은 거침없는 변신을 예고했다. 세계 몇 위의 생산량에 매출액 얼마라는 계량적 목표보다 인류, 행복, 미래라는 움직임(movement)을 제시했다. 변화의 중심점에 선 젊은 총수는 역사를 소환하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관통하는 동력으로 혁신을 선택했다. 몇 년 전 키웨스트에서의 낯선 경험이 혁신으로 융합되어 현대차의 미래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이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