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사장이 되고 며칠 후 베이징으로 1박 2일의 급한 출장이 생겼다. 갈 때는 아시아나 항공을 탔고 다음 날 귀국 길에는 대한항공을 탔다. 아시아나를 타니 승무원이 금세 사장님 호칭을 부르며 축하를 해 줬다.

반면 다음 날 탄 대한항공은 여전히 상무님이었다. 십여 년 전 대한항공 마일리지 프로그램에 가입하며 기록했던 직함이 변함없이 그대로 입력되어 있는 탓이리라. 덩치는 커도 대한항공이 서비스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아시아나에 당하지 못할 거라 생각을 했다. 
 
 아시아나 항공은 출범 당시부터 전 좌석 금연이었다.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의 고집스런 금연정책이 반영됐다. 세계 최초였다. 처음에는 걱정했다. 서비스업인데 담배 피는 고객은 버리자는 얘기인가?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으로 전 좌석 금연이 의무화됐다. 전 세계 어떤 항공기를 타도 담배를 피울 수가 없다. 철학이 시장을 바꾸고 만들었다. 혁신이었다. 

 

아시아나 항공의 초창기는 끊임없는 혁신의 시도였다. 기내식에 김치가 나오고 승무원이 악기를 연주하고 마술쇼를 했다. 기항지 위주에 담요 덮어주는 광고를 하는 대한항공과 달리 ‘아름다운 사람들’을 슬로건으로 하여 아시아나의 혁신적 서비스를 광고했다. 보이는 서비스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프투웨어까지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그래서 전 세계 최우수 항공사에 주는 ‘올해의 항공사’ 상을 네 차례나 받았다. 혁신이 이룬 성과였다. 

위기도 여러 번 왔다. 5.18 원죄를 가진 전두환 정권의 ‘호남배려’라는 딱지도 덧씌워졌다. 1993년의 목포 추락은 인명이 희생된 첫 사고였다.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커다란 위기였다.

그런데 사과광고를 금호그룹의 오너인 박성용 회장의 이름으로 냈다. 종업원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이미지가 더 좋아졌다. 그 전까지의 사과광고는 회장이 쏙 빠진 채 실권 없는 사장과 실체 없는 임직원의 공동명의 발표되기 일쑤였다. ‘오너가 책임지겠다니 더 안전해 질 거야’, 이런 고객의 믿음이 초유의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됐다. 당시 아시아나 항공 박삼구 사장의 방에는 ‘안전과는 타협 없다’는 액자가 붙여 있었다. 안전은 거의 사훈으로 격상됐다.  

 

후발주자로서 선발주자인 대한항공의 도움을 받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당시 필자의 고향인 경북 영주에 가려면 인근에 있는 예천 공항을 이용했다. 손님이 얼마 없으니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가 일주일에 두세 번 왕복할 뿐이었다. 그런데 탑승시설을 두 개 회사가 따로 운영했다. 미리 설치 돼 있던 대한항공의 시설을 임대해 쓰면 두 회사 모두 효율적이었을 텐데. 그건 회장을 바꾸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만큼 대한항공과는 앙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대한항공에 연이어 사고가 터졌다. 괌 추락사고(1997년), 상하이 화물기 추락사고(1999년 4월), 런던 화물기 추락사고(1999년 12월) 등 잇단 사고로 안전 최우선의 아시아나 철학이 새롭게 조명됐다. 급기야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길에 국빈 1호기로 선정 돼 대통령 전용기의 대한항공 독점시대에 막을 내리게 됐다. 

급성장한 아시아나는 커지는 덩치만큼 재무적 압박도 컸다. IMF 외환위기는 코스닥 등록으로 자금을 수혈 해 극복했다. 당시 코스닥은 기술벤처 등의 독무대였다.

박삼구 사장은 덩치 큰 전통기업이 신상 벤처 틈새에서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냐는 기자들의 지적에 "유곽도 모여 있어야 한다"며 농담조로 응답했다.

 

기업 가치를 높게 평가 받으려면 높은 평가를 받는 신생 벤처들과 같이 있는 것이 낫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장담은 실현되지 못했다. 아시아나 항공의 자사주를 산 임직원들은 공모가 이하로 떨어져 있는 주가 때문이 많이도 시달렸다. 

아시아나 항공에 닥친 두 번째 위기는 사실 초창기부터 잉태 돼 있었다. 고속버스를 굴리고 타이어를 팔아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항공사를 만들어 줬는데 정작 아시아나 항공은 다른 행보를 보인다는 불만이 있었다.

2002년 형님 박정구 회장의 급작스런 별세로 경영권을 승계한 박삼구 회장은 5대그룹 진입을 공언했다. 그리고 닥치고 공격했다. 2006년 시공능력 1위 대우 건설 인수(6.4조 원), 2008년 물류업계 1위 대한통운 인수(4.1조 원).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무리한 기업인수에 돈을 대야 하는 계열사들이 반발했고 때 마침 닥친 금융위기가 유동성 부족을 초래했다. 재계 7위로 수직 상승한 이면에서 보이지 않게 일어난 일이었다. '왕자의 난'이 시작됐고 그룹 자체가 부실화 되면서 2010년에는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자구노력을 경주해 워크아웃을 졸업했지만 오너의 확장 경영은 계속됐다. 금호산업을 인수하고 금호타이어를 되찾아오려고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했다.

그러다 기내식 대란이 일어났다. 대형기종인 A380, A350을 대량 발주하며 막대한 금융비용이 발생했다. 중장거리 노선 확대에 주력하고 외형 위주의 확장 정책을 펼친 것이 모두 화근이 되어 되돌아 왔다. 오너의 독선과 아집이 재무쟁이들의 숫자 놀음에 놀아나는 사이 회사는 위기를 맞았다.

2019년 3월 대기업 집단으로는 이례적으로 나온 외부감사인(회계법인)의 ‘한정’의견은 시간이 흐르며 누적된 경영실책의 표출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회장은 퇴진했고 아시아나 항공을 매각해 새 주인을 찾기로 했다. 그나마 코로나 위기로 새로 맞이하기로 했던 주인도 등을 돌려 버렸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시아나 항공이 잘 나갈 때 내실 위주의 안정적 성장을 추구했더라면 지금 오히려 대한항공을 인수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너의 갑질로 폭락한 이미지에 경영권 분쟁이 이어지고 재무위기가 닥쳤는데 대한항공인들 온전했을까.

회장의 무모한 자신감에 조작된 숫자로 비위를 맞춰 온 측근에 의해 아시아나 초창기의 혁신은 사라졌다. 오너는 눈이 멀고 귀가 막혔다. 이제 아시아나의 색동날개는 대한항공 태극날개의 일원이 됐다.

세계 7위의 초대형국적 항공사가 탄생한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게 작금의 코로나 상황이다. 돌파구는 여전히 혁신, 색동날개 초창기의 혁신 DNA만은 대한항공이 승계해 견실한 국적항공사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