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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의 행복한 경영이야기] 경제인들의 독립운동

출처: 글로벌 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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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은 한민족의 염원이었다. 총검으로, 붓과 펜으로, 낫과 쟁기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모든 한국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경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업활동으로 번 돈을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희사했다. 임시정부 비밀결사조직에 투신해 옥고를 치뤘다. 해외에서 막후의 민간외교를 통해 조선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호응을 끌어냈다.

재계의 본산이었던 전경련의 초창기 사진에는 회장 옆에 항상 노(老)경제인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해광(주)의 이원순(李元淳) 회장인데 당시 전경련의 고문이었다. 1890년생인 이원순 회장은 1914년 하와이로 망명해 반은 경제인으로 반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여느 독립운동가와 달리 가구판매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아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썼다. 독립군을 양성한 대조선 독립단의 회장(1919년), 임시정부 워싱턴 주재 구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무장투쟁과 외교적 방법을 병행하는 투쟁의 최전선에서 분투했다.

1947년 미국시민권자도 아니고 정부수립 이전이라 한국국적도 없던 그는 단신으로 스톡홀름에 건너가 한국올림픽위원회(KOC)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입을 성사시켰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이미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은 외교적 쾌거였다.

1953년 귀국 후 한국증권주식회사, 한국해광주식회사, 혜인주식회사등을 잇달아 설립해 전경련의 설립멤버로 활동했다. 재계도 독립운동가이자 경제인으로 활동한 이원순 회장의 공적을 높이 사 103세로 별세할 때까지 전경련의 고문으로 예우해 드렸다. 백수연을 전경련에서 많은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복받은 그는 이듬해 101세 잔치에서 이제 갓 돌상을 받았으니 가장 어린 경제인이라고 농담을 해 구자경 회장 등 재계 원로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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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원순 한국해광 회장(왼쪽)과 구자경 LG명예회장. 사진=전경련 제공

비슷한 시기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柳一韓) 박사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1894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 회장은 11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농장에서 학비를 벌며 미주지역의 한인소년병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해 경제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이 창업의 바탕이라 그의 기업관은 조국독립 그 자체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등과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해방 직후 귀국해 애국의 터전이었던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 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71년 타계한 그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미국에 있는 장남에게는 “대학을 졸업했으니 알아서 살아가거라”라고 했다. 독립 운동가이자 나라를 사랑했던 경제인으로 그의 이름은 사후에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됐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정신 아래 창업한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은 태생부터 나라를 위해 헌신한 민족기업이었다. 설립 당시 사장이었던 민강선생은 3.1운동 직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간 비밀연락망인 “서울 연통부”를 운영했다.

동화약품이 만들던 활명수는 한 병 값이 당시의 막걸리 한 말 상당,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지참했다가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민강선생이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자 1931년 동화약방을 인수한 보당 윤창식도 독립투쟁의 동지였다.

윤창식은 1915년 경제자립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설립된 비밀단체 “조선산직 장려계”의 총무를 지냈고,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보린회” 등을 지원하며 애국활동을 펼쳤다. 7대 사장이었던 윤광열은 보성전문학교 재학시절 강제 징집됐다가 광복군에 합류, 중대장으로 활동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활명수의 이름 그대로 민중의 생명을 구하고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구한 기업이 지금의 동화약품이다.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은 학창시절 6.10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투옥된 적이 있다. 당시 중앙고보 3학년 급장이었던 조홍제는 시위주동자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었고, 이후에도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끝내 퇴학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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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 운동 당시의 동아일보(1926년 6월19일자). 관련자 명단에 조홍제 회장이 포함돼 있다. 사진=효성 제공

경방을 창업하고 해방이후 부통령을 역임했던 인촌 김성수 선생은 192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 들러 큰돈을 기부하고 가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교보생명의 창업자 대산 신용호 회장은 1937년 중국으로 건너가 다렌, 베이징 등지에서 양곡사업으로 큰돈을 모았다. 그러면서 이육사 등 현지의 애국지사와 교류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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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형제들과 함께 한 대산 신용호(가운데). 사진=교보생명 제공

두산그룹의 창업주 매헌 박승직 선생은 1896년 오늘날 두산의 전신인 박승직 상점을 차렸다. 배오개의 거상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부를 축적한 박승직은 1907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하던 대구 광문사에 거금을 기부했다. 이때의 기부로 두산은 2001년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서상돈 상을 받기도 했다.

LG그룹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1942년 독립군 양성을 위한 자금 마련에 동참해 주기를 부탁하러 온 백산(白山) 안희제 선생을 통해 쌀 500가마니 값에 상당하는 1만원을 내놓았다. 당시 일제로부터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이에게 독립운동의 자금을 희사한다는 것은 사업은 물론 집안까지 몰락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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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포목 상점. 사진=LG 제공

그러나 그는 나라를 되찾는 일에 힘을 보태는 것이야 말로 나라를 돕는 일이라며 의연했다고 한다. 그런데 백산 안희제 선생이 경영하던 백산상회는 상해임정을 후원하던 비밀자금의 통로였는데 지금 GS그룹 경영진의 선대이자 LG그룹의 공동창업자 허만정(許萬正)회장이 설립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결국 LG와 GS는 경영상으로는 분리가 됐지만 항일애국의 뿌리는 태생부터 공유한 셈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한참일 때 전경련은 삼성이 상하이 임정청사를 복원한 만큼 충칭(重慶)임시 정부 청사는 LG그룹이 주도적으로 복원하도록 했다. 아울러 헤이그에 있는 이준열사의 순국현장을 찾아 내 복원하기도 했다. 또 독립군 출신의 광복회원이 그들의 전투 현장이었던 청산리 대첩과 하르빈 안중근 의사 저격현장을 직접 답사하도록 지원해 정확한 위치에 기념표식이 세워지게 했다. 한때는 3.1민족운동 대표 33인의 생가를 30대 그룹에서 모두 복원해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동하자는 의견도 나왔었다.

기업의 활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경제인들에게는 태어나 죽을 때 까지 국적이 따라 붙는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일찍부터 느낀 한국의 경제인들은 어느 나라 누구보다도 애국의 신념으로 독립을 꿈꿨다. 이제 곧 광복절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경제인들의 독립운동을 찾아 내 국민들과 공유하는 것은 한국 경제계의 뿌리를 찾는 또 다른 과제라 할 것이다.

글로벌경제신문 경영자문위원/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저작권자 © 글로벌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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