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것은 30대 중반인 그가 그때 이미 10년, 20년 뒤 우리 산업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자동차와 조선에 쓰이는 특수강까지 만드는 제철소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 같은 김재관의 제철소 방안에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제철소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결국 일본은 김재관 방안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포항종합제철(포스코) 신화의 시작이다. 그가 그린 포스코 공장 배치도는 20년 뒤 생산 규모가 9배로 커졌는데도 조금도 변경없이 적용할 수 있었다.

그 후 김재관은 KIST에서 ‘한국 기계공업 육성 방안’을 보고하고 박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한다.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골간이 선철, 특수강, 중기계, 조선이었다. 선철과 특수강은 산업의 쌀인 동시에 대포 등 무기를 만드는 재료였다. 김재관은 뮌헨공대에서 독일군 함포와 대포의 금속 조성을 공부해놓고 있었다. 중기계는 탱크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조선은 유조선과 동시에 군함도 만들었다. 오늘날 K방산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상공부 중공업차관보로 임명했다. 김 차관보는 일부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해 ‘한국형 승용차 양산화’ 계획을 채택시킨다. 조선과 자동차 모두 당시 기업인들은 손을 저었으나 유일하게 정주영 회장이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신화의 시작이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ADD(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에 임명한다. 임명된 날 당시 심문택 소장, 김재관, KIST 조선 담당 김훈철 세 사람은 남해 한산도 충무공 사당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임전무퇴로 국방기술을 완성한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ADD에서 미사일까지 나왔다. 당시 박 대통령이 KIST 연구원들에게 밥을 사면 그 자리에서 코피를 쏟는 연구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의 이 나라는 그냥 된 것이 아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여러 경로로 확인한 결과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기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영웅이 있다. 그들을 알고 기리는 것 이상의 후세 교육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