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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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1월 29일 근무를 마지막으로 이 병원에서만 33년 반을 일하고 드디어 은퇴를 했다. 

일은 예전보다 훨씬 쉬워져서 얼마든지 더 할수 있었지만 70줄에 들어선 나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칠십 넘은 할머니가 아직도 일을 하다니...   그 엄청난 숫자의 나이는 어떻게 감당하기 어려웠다.

 

 "Retire," the unstoppable British actress, Judi Dench declares "is the rudest word in my dictionary."

 

옆에서는 시력도 좋고 기억력도 좋고 아뭏치도 않은데 왜 벌써 은퇴하느냐고 말리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또 한살이라도 더 먹기전에 은퇴하고 남은 생을 여행도 하며 즐기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은퇴를 하면 뭘 어떻게 하며 살리라는 뚜렷한 계획도 목표도 없이 그냥 세월에 등 떠밀려 은퇴를 했다.

무엇보다도 근 십여년 어린 약국장 Team 이라는 사람들의 씨가 안먹는 간섭, 부조리한 통치가 견뎌내기 힘들어 은퇴를 결정했다.

 

 

 

 

과테말라에서 온  Pharmacy buyer가 준 은퇴 축하 카드. 이름이 Liz, Elizabeth의 약칭인데 진짜 Liz Taylor처럼 눈이 예뻤다.
그애도 나이가 65세 가까워 늘 은퇴를 이야기 하는데 Technician 이랑 약사들이 잘못하면 야단도 치고 아주 무섭다

 

하지만 나와는 서로 돕고, 너무나 잘 통해서 별별 이야기를 다 하고 지냈다
너를 보면 옛날 우리 고교때 무시무시하던 체육 선생님 생각이 난다니까 우수워 죽겠다고
 
학교 다니던 이야기를 하는데 하루는 가사 시간에 살아 있는 닭을 잡아 요리를 하라고 했단다
"I'm not gonna kill any chicken." 하고 뱃장 좋게 반항을 했다는 이야기가 너무 우수웠다.
 
"~~~  과테말라라.  여자들이 챙넓은 모자 쓰고 가로로 줄무늬있는 색갈 요란한 옷 입고 당나귀 타고 다니는 곳 아냐?"
"That's old days."  지금은 그렇치 않단다.   ㅎㅎ.
 

 

 

  

 

조촐한 내 은퇴 파티.  그냥 조용히 사라지겠다니까 억지로 간단히 마련한 Cuban Sandwich와 케익, 과일등...

But I hate this awfully sweet cake.  And I don't care for greasy and smelly Cuban sandwich either. 

 

전에 보면 많은 의사나 간호원들이 은퇴를 하면 다른 주 (州)로 이사를 갔다. 

어떤 간호원은 마이아미에서도 한시간쯤 남쪽으로 떨어진 Key Largo, Florida 에서 살다가 은퇴하자 북쪽의 Connecticut 주로 이사를 했다.

 

'Shouldn't you do it the other way around?" (그 반대로 해야하는것 아니니?)
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ㅎㅎ 웃었다.  자기 아들이 Connecticut 주에 농장을 갖고 있고 온 식구들이 거기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 하나는 North Carolina 로 간다고 했다.  이 사람도 식구들이 거기 산다고 했다. 

은퇴를 하면 남쪽으로 가야지 추운 북쪽으로 가다니...

하지만 이유야 어쨌던 간에 아무데고 갈곳 있는 사람들이 몹시 부러웠다.  내가 은퇴할때가 되니 자꾸 그들이 생각났다.

 

어떤 사람은 은퇴 첫날부터 아침마다 출근 안해도 되는것이 너무 고마워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다는데 난 영 그렇치가 못하다.

갑자기 긴긴 휴가를 받긴했는데 어떻게 놀줄 모르는 사람처럼 매일이 황당하다.

크고 작은 집안 일이 쌔고 쌨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집안 청소에서 부터 의사 보는것. 건강 보험, 우리집 재정 상황 챙기는것, 등등

골치아픈 일이 쌓였는데 손하나 까딱하기 싫다. 

 

청소는 우선 허리 아파 못하겠다. 기껏 하는것이 부엌 counter 절반쯤 치우고 끝이 난다.

오늘만 날이냐?  내일도 있고 모래도 있다. 허리 쑤시고 팔 아프고 손목도 아프니 나누어 하자. 

이러다 보니 어쩌다 크게 작심하고 하루 집안일 한다는 것이 겨우 부엌 냉장고 정리,  그것 하나 하고 나면 하루가 다 간다. 

 부엌에서 헤어 나지를 못한다.   

 

청구서에 돈 내고 세금 내고 은퇴 투자, 이런 사무는 너무 재미없어 비서를 하나 두던가해야지, 생각만 해도 우선 신경질부터 난다.

내겐 약국에서 일하는 것이 천만번 나았다.  내가 할줄 아는 것이라곤 그 약국일 뿐인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와서 보니 좀 일찍 은퇴를 하는것도 괜찮은 생각인것 같다.  좀더 기운있을때 은퇴하면 자신있게 하고 싶은 것을 더 잘 해볼수 있을것 같다.

앞으로 남은 시간 어떻게 잘 놀면서 살것인지 요량이 생길것 같다.  말하자면 은퇴를 제대로 enjoy 하는 법을 배울수 있을것 같다.

 

한 십여년전 쯤 내가 다니던 의사가 나이 60쯤 밖에 안된것 같은데 갑자기 은퇴를 한다고 하기에 내가 말했다.

"You're too young and healthy to retire."

"That's exactly why I'm retiring."    

왜 벌써 은퇴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였다.  그땐 무슨 소린가 했는데 지금은 좀 이해가 된다.

 

집에 있고 보니 매일이 똑같은 날들이라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부터 알수가 없다.

부엌에 버젓이 커다란 달력이 걸려있건만 그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

 

오늘이 몇째 주, 무슨 요일인지 아니면 며칠인지, 둘중 하나는 알아야 달력도 쓸모가 있는거지 이것도 저것도 모르면 아무 쓸모가 없다.  

특별히 의사보는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날이면 그날부터 앞뒤 전후로 좀 정리가 되어 알아내지만 그런것도 없으면 그날이 그날이다.

 

이런 날들은 또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1994년, 구멍가게 같은  암환자 병실 약국에서.

 

옛날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위성 약국 (Satellite Pharmacy) 에서 암환자 치료에 관한 모든것을 혼자 맡아서 했다.

암 치료 약뿐 아니라 구멍가게처럼 아스피린에서 부터 별별 기본적인 약들을 다 늘어놓고 One Woman Show 를 벌리며 처방이 오면 약을 보냈다.

나는 5층 암환자들 병실 한가운데 있는 Satellite 에서 살고, 약국장 팀은 저 아랫층, 본점에 멀리 있어 얼굴 잘 안보고 사니까 마음이 편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의사와 간호원들로 처방이 오면 재주껏 잘 검토해서 약을 주고 그들의 문의와 상담에 응했다.

얄팍한 지식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문헌을 찾고해서 그들을 도왔다. 

 

처음엔 하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를 온 촉각을 곤두 세우고 들었다.  들으며 배웠다.

약사 시험은 무난히 합격해서 약사가 되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것만 가지고는 일을 할수없었다.

병원에서 직접 보고 들으며 당해보는 임상 업무가 나 같은 사람에겐 훨씬 생소하고 어려웠다.

 

우선 의학 영어에 많이 무식했다.  겨우 일년간 미국의 약대, 5학년에 편입해서 약사 시험을 통과한 나는 사실 허점 투성이였다.

십여년 전에 한국에서 약학 공부랍시고 쓴약 먹듯 꾸역꾸역 억지로 삼켜 대한민국 약사증을 받아는 놓았으나 그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학 자체가 신비한, 무궁무진한 학문이니 그걸 하나하나 배우다보면 실증 날 겨를이 없었다.

책에서 읽은 많은 약들의 용도, 부작용들도 단번에 기억하기 어려운데 직접 써보고 경험해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으면 머리에 싹 들어왔다.

 

간호원들은 또 대부분이 산전수전 다 겪어 경험도 많고 영어도 바삭해서 말싸움도 잘했다.

자기네 입으로 "Mighty mouth" 라고 인정하는 이 사람들과 일하면서 나는 영어도 많이 배웠다.  

 

그때 내가 은연중에  갖춘 무기라고는 한국의 초등 학교에서 부터 대학까지의 교육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그냥 보통 정도의 기억력 뿐이였다.

그런데 미국에서 일년 배운 약학 공부는 한국에서와는 달리 흥미있었다.

나이가 들어 철이 난건지 아니면 의사처럼 임상 약학을 주로 가르치는 이곳의 공부가 적성에 맞았던것 인지도 모른다.

 

처음 병원에서 일을 시작했을땐 조그만 노트를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생소한것들, 꼭 기억해야할 것들을 적어 두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아는지를 이 병원이 안다면 나를 써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나 하나 배우면서 일하는 생활이였는데 부족한대로 성심껏 환자를 돕자는 그런 태도로 일을 하니 즐거웠다.

이런 일을 할수있는 기회를 갖게 된것만 감사했다.

 

또 하나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던것은 한달에도 몇번씩 있는 Continuing Education Seminar 였다.

주로 제약회사들이 돈을 내서 자기네 새로운 약을 기존의 약과 비교하며 그 분야의 권위자들을 불러 강의도 하고 토론, 질문을 한다.

 

말이 좋아 Continuing Education 이지 나 같은 사람에겐 Beginning of Education.  생소한 이야기가 너무 많으니 열심히 노트를 했다.

그땐 세월이 좋아 제약 회사들이 약에 대한 새롭고 유익한 정보뿐 아니라 좋은 호텔에서 맛있는 음식, 또 크고 작은 기념품들도 많이 주어 재미있었다.

지금은 경제 상황도 그렇고, 법이 바뀌었다고 자기네 회사 이름이 적힌 작은 메모지 하나도 줄수 없다고 한다.    

 

그때 나는 혼자서 암환자들과 수술 환자들 병실, 두곳을 맡아 병실이 도합 100개가 되었다. 

지금은 컴으로 약 주문이 나오지만 그땐 종일 돌아다니며 paper order (처방전)를 수거해야했다.

 

종일 층계를 오르나리고, 걸어 다니며 터득한 것이 약사는 우선 다리 힘 좋고, 기억력 좋고, common sense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먼저 다리 힘 좋아야하고, 새로 듣는것 너무 많으니 한번 들으면 대충이라도 기억할수있는 뛰어난 기억력도 도움이 된다.

 

또 무슨 일을 하던 그렇치만 이 commom sense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건 경험으로 배워서 얻기도 하지만 타고 나야한다.  긴가민가 잘 모를땐 직감을 믿고, 서둘지 말고 침착하게 더 파고 들어 생각하는 능력이다.  

 

"But common sense is not very common, Shin."  

약사들이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대로 성의없이 대답해주는 바람에 몇번 당해본 간호원들이 내게 말했다.

 

한 50여년 전 옛날, 한국에서의 약학 공부는 그때 정말 공부를 하기나 한건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땐 약학 공부라는 것이 너무 재미 없었다.  얼렁뚱땅, 항상 공부는 뒷전으로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영화도 보고, 툭하면 다방에 모여 떠들고. 

그러자니 용돈이 필요했다.  우리 여러 형제들 등록금만 내주시는 것도 힘 겨우신 아버지께 용돈까지 타 쓸수는 없었다.

 

가끔 급하면 꼬마 동생들 시켜 둘째 누나 돈이 좀 필요하다고, 청을 드리긴 했지만 가정교사가 주업이였다.

수업은 빠져도 가정교사는 빠질수가 없었다.  그래도 등록금 싼 서울대에 들어갔고, 용돈은 내가 벌어 쓴다는 것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한번은 나도 장학금을 한번 타 보자고 열심히 애를 써서 평균 B학점을 받았다.  의기양양해서 제출했더니 얼마후에 통고가 왔다.

우리집 재산세가 높아서 자격 미달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담부턴 더욱 내 맘대로 였다.  교수님이 좀 맘에 들면 정신차려 듣고, 싫은 분은 그저 얼른 시간이 지나기만 바랐다.

아침에는 매일 늦어서 문앞에서 다른 지각생들 오길 기다렸다. 

커다란 교실에 하나뿐인 문이 하필이면 맨 앞쪽에 있어서 들어가면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려 혼자서는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학생들 90명에 여학생들 20명, 100명이 넘는 숫자가 다 같이 강의를 들으니까 나처럼 늦는 사람들은 꼭 있었다.

지각한 남학생들이 먼저 들어가면 그뒤에 숨어 재빨리 들어갔다. 

 

우린 그때 성(姓)씨대로 번호를 매겼다.

나는 그 많은 이씨(李氏)들 중 하나로 73번인데 내뒤 74번인 남학생은 내 실험 짝으로 출석 부를땐 대신 대답을 많이 해주었다.  

내 대답은 여자처럼 가늘게 자기 것은 남자 목소리로 굵게 대답하는 그는 장난끼도 있는 사람이 반듯하고, 내 막내 동생처럼 아주 착했다.

그는 아침 일찍 인천에서 통학을 하건만 서울 용두동 사는 나보다 일찍 와서 내 출석을 대답해 주었다.

 

어느땐 내가 어쩌다 제 시간에 와서 한껏 큰소리로 대답을 하는데 저쪽에서 또 그가 대답하니 혼성 합창이 되어 아이들은 ㅎㅎ 웃었다.

"네~" 하다말고 깜짝 놀라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내가 와 있는데 왜 대신 대답하느냐 물었더니 모기같은 목소리가 항상 앞에서 엉기니까 그냥 대신해주기로 작정을 했다는 거다. 

다른 여자애들은 좋겠다고 부러워 했다.  대답해줄 사람 있으니 출석부는 걱정없다는 것이였다. 

 

하긴 여자가 더 등교 준비할 일이 많치만 전부 내 탓만은 아니였다.

도서실도 가고, 잔디 밭에도 앉아 보고, 학림 다방에도 가면서 대학 생활을 즐기는데 학점도 잘나와  장학금도 받는 언니 탓도 있었다.

 

내가 막 집을 나서려고 하면 언니는 그제야 부시시 일어나며 말했다.

 "얘, 내 머리 좀 해주고 가라."  

 

그때 막 나가도 시간에 댈까말까했지만 매정하게 그걸 거절할수가 없었다.

내 솜씨가 그래도 괜찮아 부탁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머리 만져주는 일이 나는 아주 재미 있었다.

언니뿐 아니라 엄마의 머리도 내가 멋있게 둥글려서 올렸더니 늘 그렇게 하고 있으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단다.

 

사흘 돌이로 아침이면 이렇게 언니 머리를 해주다보니 종로 5가에 내렸을때는 이미 강의시간이 임박했다. 

거기서 또 뻐쓰를 잠간 타야하는데 뻐쓰는 빨리 오지도 않고...   늘 지각이였다. 

 

맨날 지각은 해도 남학생들도 많은데 성적  너무 나쁘면 창피하니까 당일치기 시험공부에는 달인이 되어갔다.

우린 그때  소위 Honor System 이라고 감독없이 시험을 보았는데 난 내 시험지를 꽁꽁 싸들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학교가 우리를 믿고 감독없이 시험을 치게 하니까 내것 보여주어도 안되고 남의것 보려고 해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한번은 답이 생각이 안나 거의 다들 나가버린 텅빈 교실에서 끙끙대고 있으니 그 짝이 지나다가 뭐가 문제냐는듯 눈짓을 했다.

얼결에 말을 했더니 슬쩍 답을 가르쳐주곤 나갔다.  참 그렇치.  나는 얼른 답을 적어 넣었는데 좀 미안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알량한 내 시험지를 아무도 못보게 꽁꽁 싸매는 내 버릇이 양심에 걸렸다.     

 

Honor 라고 했는데도 한번은 시험이 끝나자 어느 남학생이 말했다. 
답이 생각 안나 옆에 여학생 시험지를 힐끔거렸으나 뭐라고 쓴건지 그 답을 도저히 읽을수가 없었단다.  
그 여학생은 공부도 꽤 하고, 씩씩한 성격으로 잘 웃고 털털했다. 

그런데 글씨도 자기 닮아 그야말로 좀 달필(?)이였다. 

말은 안했지만 사실 지나치게 씩씩한 그애 글씨를 잘 아는 나는 정작 그 본인과 또 그 남학생과 함께 허리를 잡고 깔깔댔다.

 

나는 공부가 재미없으니 딴전만 피웠다.  지루한 시간을 메꾸려니까 보기좋은 note를 꾸미는데만 신경을 썼다.

글씨 잘 쓰는 아이가 있으면 잘 보고, 글씨 흉내도 내고, 가능하면 한자 단어를 많이 써넣었다. 

약학 공부가 머리에 안들어오니 한자라도 써넣어 한자 복습도 하고 좀 유식하게 보이는 노트라도 만들어 보자는 장난끼였다.

 

사실 나는 그때 꽤 많은 한자를 알고 있었다.  천자책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는데 한자를 많이 안다고 아버지는 은근히 흡족해 하셨다.  

하지만 그땐 신문이나 잡지, 길거리 간판등에 한자가 쌔고쌔서 항상 딴청 잘 피는 나는 자연스레 한자에 익숙해졌다. 

 

언젠가 본초학 (本草學) 강의라는 시간이 있었다.  할아버지 교수님이 들어오셨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였다.

칠판에 자꾸 쓰시는데 옆에서 뒤에서 여학생들이 마구 쑤군쑤군 댔다.  한국 제일이라는  유명 여고를 졸업한 친구들이였다.

아하~   그 학교에선 한자를 너무나 안 가르친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사대부고 시절 우린 일주일에 한번, 한 일년쯤이였나?  한문 시간이 있었다. 

 

나는 노트를 쓰다가 잘못된것이 있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아주 강조해서 줄을 쫙쫙 긋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괄호를 쳐서 보관했다. 

그러니 내 노트는 글씨도 그만한 것이 깨끗하고, 한자도 많아 아주 inteligent 한 여대생의 노트였다.

글씨라도 신경써서 잘 쓰면 교수님이 채점할때 첫인상이 좋고 골치 안 아프게 잘 읽으실테니 학점도 좀 너그럽게 나올꺼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내 노트를 빌려간 사람들은 골탕을 먹었다.  틀린것까지 다 베낀 다음 앞뒤가 안맞는 것을 알아챘는데 그땐 이미 늦었다.  

 

그땐 아무튼 이것 하라면 저것 하고, 저것하라면 이것 하고, 청개구리처럼 마구잡이였다. 

대학에 들어와서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걸 깨달았다. 

물론 중고교때도 좀 미심쩍긴 했지만 학교 생활이 너무나 엄격하고 하도 욱박지르니까 그런걸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First thing first.  우선은 딸딸 외우는 공부라도 잘해서 선생님 비위 안 건드리고,

엄마, 아버지 걱정 안 끼치고, 또 아무 탈없이 대학을 들어가야 했다.

 

미국에 와서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로 6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이곳 약대는 어떤가 궁금해서 마지막 1년 과정에 편입했다.

Ohio Northern University는 작은 사립 대학이였는데 그해에 놀랍게도 26명의 한인 약사들이 왔다.

이들은 한국에서 이민을 왔는데 기혼인 사람들도 많아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이 학교를 일년 다니고 졸업장을 따내야  미국 약사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졌다.

그때 중국, 인도, 필립핀등 여러 나라에서 약사들이 왔지만 많아야 그저 대여섯명 정도로 한국처럼 많이 오지는 않았다. 

 

이민온 이 한국 약사들은 미국에서 대학 강의를 들어 본적이 없는데다가 말이 좀 바삭해야하는 약학(藥學) 공부이니 걱정이였다. 

나는 그때 Michigan에서 Postdoc을 하던 사대부고와 약대 동기, 현정춘과 의기투합해서 이 학교에 등록을 했는데 박사 둘이 온다고 소문이 다 났었단다.  

 

아무나 지나는 사람보고 "당신이 박사요?" 묻다가 " 박사님은 빨간 옷을 입고 오신다고 했는데..."  하며 짓고 까불었단다.

그때 한 사람이 2-3년 전에 거기서 공부하고 간 사람의 노트를 빌려와서 다들 그덕을 좀 보려했으나 그는 혼자만 보려고 집에 병풍까지 쳐놓았다고 했다.

 

만나서 인사를 하고보니 사대부고 14회 여학생 후배, 경기여고 나온 서울 약대 1년 후배등, 아는 사람들이 있어 서먹하던 벽은 금방 다 허물어져 버렸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 공부를 도와주면 우리 등록금은 자기네가 내겠다고 했다.  이들 중에는 아직 어려운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약국도 했었고, 기반 잡힌 사람들도 많이 있어 이런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것 같았다.     

 

우린 고맙게 제의를 받아 들였고 26명의 대 식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  정춘이도 있겠다, 한국 사람 못 보고 살던 내겐 즐거운 경험이였다.

우리들은 노트를 빌려주고 매일 저녁이면 모여서 다 같이 복습을 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역시 terminology, 영어였다.

 

공부가 끝나면 학교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Cafeteria의 미국 음식을 한상 가득 가져와서는 먹지를 못하고 그냥 깨적거리기만 했다. 

밥상에서 일어나면서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자고 했다.  

라면 같은 고향 음식을 먹어야 뭘 먹은 것 같아서 stress도 좀 풀리고, 에너지 충전이 되어 공부도 할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여자들도 14회 후배 집에 모여 라면도 끓여 먹고, 웃고, 떠들고, 재미있었다.

피짜 가게 하나, 극장 하나 밖에 없는 Ohio의 아주 작은  school town 에서 우리 한국 학생들이 기를 펴고 살던 일년이였다.  

 

제일 우수웠던 일은  갑자기 꽤 많은 약 이름, 함량 같은 것을 그 다음주 시험날까지 외어야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Tapazole (Methimazole), 5mg and 10mg tablets"

 

졸업후 약사 실무 경험이 전혀 없던 나와 정춘이는 참으로 황당했다. 
이게 누구네 집 애들 이름도 아니고,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다 외우느냐고  울쌍이 되었다.

 

그러자 경상도 사투리도 좀 쓰는 익살맞은 사람이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해결책을 내놓았다.

"타파졸 (상품명), 타파졸, ...   타파절.  절을 타파하자.  예전에 왜 절을 타파하자.  그런 이야기 있었지요?

 어떻게?  메치마졸 (화학명).  매를 쳐서 타파하자."

"그럼 5mg and 10mg은???"    "아, 그 왜 한국 시골에 가면 절이 오리, 십리마다 있잖습니까?"

 

이런식으로 20-30개 되는 생면부지, 금시초문의 약 이름들을 깔깔대며 순식간에 모조리 외어 버렸다.

시험장에서도 킥킥대며 다들 만점을 받으니 다른 나라 아이들이 의아해 했다.  

그러나 한국말을 모르면 이해할수 없는 일, 우리가 도와 줄수도 없었다.

 

우리 한국 약사들은 1975년 5월, 낙오자 하나 없이 약대 5학년, 1년 과정을 무난히 마치고 졸업을 했다. 
그후 미국 약사 시험도 한명 빠짐없이 다 합격한후 여러곳에 헤어져 일을 했고, 진작에 은퇴한 사람들도 있다.

졸업 십년후 Reunion을 하자고 했으나 십년은 커녕 지금 사십여년이 되어 가도록 그걸 이행치 못하고 있다.

 

 

  

 

1975년, ONU (Ohio Northern University) International student club, 자국 문화 전시회에서.  내 오른쪽에 친구, 현정춘이 있다.

 

  

                                                                                                                                            (9/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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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51년 전 제자들에게 (18회 용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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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나의 선생님 강진경(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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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밍크 이불에 얽힌 사연 / 신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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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시네마클럽 100회 기념일(18회 용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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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바늘과 실의 인연 / 신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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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빈집 / 신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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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겨울을 넘는다 / 신현숙 (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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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우리집 고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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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손톱에 박힌 가시꽃 / 신현숙( 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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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약(藥)을 선물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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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유칼립투스* 나무로부터 온 편지 / 신현숙 (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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