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한국 노래는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노래뿐 아니라 문화 자체가 세계의 주류시장에 편입되지 못했다. 한국어를 쓰는 인구가 얼마 되지 않고 국력도 한참 뒤쳐져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자조적 평가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국내 시장은 협소 했고 문화예술인은 가난을 숙명처럼 먹고 살았다. 

영어를 쓰는 사람이 많고 가장 잘 사는 나라인 미국과 영국은 자연스레 세계의 대중문화 시장을 주도했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중간중간 다른 나라에도 기회가 있었다. 1970~80년대에는 홍콩영화 열풍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문화 바람이 불었다. 필자가 유럽에 체재했던 80년대 후반에는 일식(스시)이 가장 핫했던 접대 방식이었다. 90년대 일본문화수입이 금지 돼 있었지만 중고교생들은 일본의 헤비메탈 엑스재팬의 연주 앨범을 거의 모두 돌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이 됐다. 영화와 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 문화는 주류가 됐다. 전 세계 한류 팬이 1억 명을 넘어서고 팬덤 역시 넓고 두터워지면서 K팝에는 글로벌 규모의 팬더스트리(fan + industry)시장이 만들어졌다.

세계 음반 산업을 대표하는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K팝과 한국의 음악시장은 전년 대비 44.8%라는 압도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트위터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트위터에 K팝을 언급한 사용량은 2010년 509만 건에서 지난 해 61억 건으로 10년 만에 1100배로 팽창했다. 소통을 원하는 팬과 아이돌을 직접 연결하는 앱이 잇따라 개발되는 등 K팝 팬더스트리는 8조 원에 이른다고 IBK기업은행이 추정하기도 했다. 

K팝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2002년 2월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5인조 남성그룹 HOT가 중국 베이징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때는 몰랐다. 아이돌 공연으로 여겨졌던 이 콘서트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팝과 한류 열풍의 시조가 되고 한국 문화가 세계시장을 강타한 새로운 산업으로 커 갈 줄은. 당시 중국 청소년들이 HOT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룬 풍경을 중국의 유력 매체들이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보도하면서 ‘한류’라는 표현을 썼다. 

K팝이 산업이 된 것은 기업의 힘이다. HOT는 SM엔터테인먼트 설립자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내세운 첫 아이돌 그룹이었다. 1995년 SM엔터를 설립한 이수만은 창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 개척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세웠다. 한 기업이 창출한 먹거리가 세계의 문화 시장에 한국을 편입시키고 급기야 그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이 됐다. 

산업으로의 성장과정을 보면 K팝은 한국경제의 발전 모습과 정확히 그 궤를 같이 한다. 의욕 넘치는 창업자가 무모할 정도의 목표를 가진 기업을 세웠다. 기술을 개발하 듯 스타를 육성했고 세계적 안목에서 체계적 훈련을 했다. 전략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해외 진출을 끊임없이 타진했고 앞선 IT환경의 도움을 받아 일찌감치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것이 팬덤에서 팬더스트리로 진화하고 도약한 과정이다.

다행히 정부는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지원이 없었기에 규제도 피해갔다. 그러면서도 정상외교의 현장에는 K팝 공연을 곁들여 문화를 주제로 한국의 국격을 높여갔다. 도와 줄 것이 없기에 나서지도 않았는데 덕분에 K팝의 창의성은 최대로 발휘될 수 있었다. 

팬 커뮤니티 플랫폼 시장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의 경쟁이 뜨겁다. 마치 반도체 생산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고 유통에 롯데와 신세계가 있듯이 이들의 경쟁은 산업으로의 K팝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이제 K팝을 중심으로 시작된 팬덤 문화산업은 아시아와 북미를 넘어 유럽, 남미 등 세계 대중문화 산업의 주류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또 ESG의 선한 바람이 전통 산업의 현장에 불어 왔다면 K팝의 선한 영향력도 팬덤 산업에 불어왔다. 동남아의 태풍 피해자 돕기 기부, 호주 산불 당시의 성금 모금, 기후행동플랫폼(K팝 포 플래닛)의 개통 등으로 이제 K팝은 재미와 즐거움을 넘어 사회를 바꾸는 시민운동으로 스타와 팬을 공생의 파트너로 맺게 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세계 문화 산업의 주류가 된 K팝과 한류는 SM이라는 기업이 도화선을 당겼다. SM은 그때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국내 대중문화에 글로벌의 판을 깔아 규모를 키웠다.

여기에 2000년대 들어 JYP와 YG가 경쟁레이스에 가세하면서 콘텐츠의 질과 다양성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기업을 믿어야 한다. 경쟁의 힘을 믿으면 기업은 산업이라는 먹거리를 나라와 국민에게 선물한다.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한 K팝을 보면 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지 자명한 답이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