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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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짙은 시간 *

하늘따라 포부는 드높았고
주위의 모든 것이 꽃답던 시절,
그 푸르던 나이에 나는 어느 문학 청년의
이런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기성 세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하루 중 가장 짙은 시간은 언제 입니까?”

기성 세대라야 부모님을 떠올렸고,
나는 애들을 절대로 야단치지 않고 기를 것이며,
너무 큰 옷을 사 주어 다 낡아진 후에야 맞게되는
그런 우매함을 되풀이하지는 않으리란 것이 고작이었으니,
아마도 그 보다는 고차적인 답을 찾아 전전긍긍 했으리라.

더구나 시간이란  보이지 않는 관념을 두고,
짙다거나 옅다거나하는 색감으로 표현하는 이 사람의
질문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유수와도 같고 쏜 살과도 같다는 세월이
내게도 정말 꿈처럼 흘러 갔고, 이제 대학 갈 딸아이가
나를 비판할 “기성 세대”라는 대상이 되었다.
하루 중 짙은 시간은 고사하고, 사 계절을 다 보내고도
시간의 짙고 옅음 따위를 가름해 볼 마음의 틈이 없는 나는
다만 늘상 뜨듯한 캘리포니아 날씨를,
뛰어도 바쁜 이곳 생활을 핑계 대 본다.

그러나 이제금 다시 일상 생활 중
가장 짙은 시간이 언제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없이 “편지를 쓸 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짙은 시간이란 아마도 즐거움뿐 아닌 괴로움을 동반할지라도
의미 있는 시간쯤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편지를 쓸 때이다.
편지를 쓰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지는 자신을 보며,
차분한 반성도, 소녀스런 감상도 갖게된다.

이 땅의 온갖 풍요로움  속에서도
내 정서의 잎새는 푸르고 윤기나기는커녕,
누렇게 시들어 가고있음을 자각하는 것도 이 편지를 쓸 때이다.
편지를 쓰면서 나는 “또 하나의 나” 와 만나게되고,
오만의 때가 묻은 끈끈한 마음결을 말끔히 씻어내는
신선함도 맞게된다.

그런데 나는 편지지를 편한 자세로
쉽게 대하지 못하는 난처함에 익어 있다.
상대에 따라 쓸 말을 머리에 담고,
이틀도 삼일도 일주일도 더 지난다.
이것은 내가 시간에 쫒겨서라기보다,
또는 게으름을 피워서라기보다,
소중한 이에게 줄 선물을 수 놓듯이,
천을 고르고 색실을 고르며 수 본을 뜨는 작업이랄까?
상대편이야 알던 모르던 이것은
내가 즐거워서 베푸는 성의이며 애정인 것이다.

이렇게 깨알같이 시작한 글도 나중에 맺을 자리가 모자라,
가장자리 여백을 뺑뺑 돌려가며
항공 봉함 엽서 한장을 쓰는데 꽤나 오래 걸린다.
24 시간이 온통 내것이었던 때엔 잉크 한 방울 튀어도,
획 하나 비뚤어져도 다시 쓰곤했고,
겉봉엔 곱게 장식까지 하던 성의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정성도 정열도 서서히 주부의 책임 속으로
녹아들어 갔고, 글씨는 점점 더 난필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다시 한번 읽어보며,
그러다 어느 구절 상대방이 거부감을 느낄 것같거나
안 쓸 말을 썼다싶으면,
우송료가 포함되 있는 그 파란 종이를 구기고만다.
몇 십전을 버리는것이 차라리 몇 십리의
마음의 거리를 떼어놓는 것보다 나으며,
괜한 말을 써서 어머님께 몇 십근의 근심을
드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나는 편지를 사랑한다. 편지란 것도 흔한 것이요,
사랑이란 그 보다 더 흔한 것이됬지만,
나의 편지에 대한 감정을 어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편지는 항시 내 곁에있는 유용한 도구(?)이기도하다.

결혼 후 첫 싸움을 하고나서 그 사람 얼굴조차
다시 대할 수 없을 것같던 절망감에서 밤 새워 쓴 편지는
어느 새 나에 대한 반성과 그에 대한 건의로서
하나의 결말, 공통 분모를 만들게 하였다.

또한 십 수년을 두고, 두 주가 멀게 이어지는
모녀지정의 가교(架橋)도 이 편지이다.
그것은 며칠을 두고 쓴 일기체의 생활 보고일 때도 있고,
이제서야 부모님 은덕을 깨달은 애절한 감사장이될 때도 있다.

어려서 귀밥 뚫는 허락을 안 해준다고 울면서 자러 간 딸아이가
편지를 써서 우리 방문 앞에 놓은 것을 보고
남편이 나를 깨운 적이 있다.
당신이 지금 자게 되있지를 않다며 내보인 그 종이에는
“I hate you with good reason.” 이라고 시작해서
차라리 딴 집에 adopt 됬던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피곤이 다 무엇인가 정신이 버쩍 나는 것이었다.

한 밤중에 아래층으로 내려와 식탁에 노트장을 펴 놓고,
이층으로 송달할 그 편지에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지
한참을 썼다 고쳤다 여러 생각 속에 신새벽을 맞았던 적이 있다.

여덟살 딸의 가슴에 박힌 옹이를 빼 내고,
서른 세살 엄마 가슴에 고인 모정의 물을 길어 붓는 데에는
꼭 사전에서 찾아야 할 어려운 단어가,
고급의 문법이 필요한 것은 아닐 터였다.
쉬운 말이나 따듯함을 담아 아이의 마른 가슴을 적실 수 있어야하며,
타협의 여지를 보이되 부모의 줏대없음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에
이 우둔한 엄마의 고심이 더 했었다.

그 밤, 홍두깨같은 딸의 도전장(?)으로하여,
나는 내가 어머니를 속상하게 해 드렸던 지난 날도 떠올려 보았고,
실로 오랜만에 맞은 적요함 속에서 연애 편지를 쓰는 이상의
곤혹과 열정을 맛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내 방문 앞에 “엄마 말이 옳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써서 미안하다.
나는 엄마가 뭐라고 답을 썼나 보려고
5시에 일어났다 또 잔다” 고 써 있었다.
한밤을 두고 오간 편지가 우리 모녀지간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준 치료제가 된 것이다.

이렇듯 “서로 소식을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 보내는 글”
이라고 사전에 풀이된 “편지”란 낱말이
나에겐 그 이상의 의미가 되고 있다.
내가 수다스러워서 카드 한 장에도 소식, “나 잘 있다”
용건, “너도 잘 있고 복 많이 받아라!” 고
간단히 쓰지를 못하는 것일까?

일년에 한 두번 소식을 전하는 친구에게
지난 생활의 변화와 가족 얘기, 내 생활 감정 등,
때로는 각오와 반성까지 담게 되는 것이
“편지”란 낱말의 뜻을 넘어선 지나친 자기 발산일까?
오래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이 “만복을 빈다”는
단 한 마디였을 때, 나는 무엇인가 허전했다.

생각했던 모든 것이 항시 맑음에 머물 수 있고,
보아온 모든 것이 오래도록 생(生)을 밝힐
보석일 수 있으리라던 기대도 겹겹이 벗겨져 나간지
오래인 지금, 차라리 손에 남은  것은
놓아버릴 수도, 떼어 낼 수도 없는 끈적한 현실이 아닌가!

그리하여 작고 또 작아진 소시민이요,
두 아이의 성장 만큼 키워온 모성애를
소중히 지니고 있는 중년으로서,
“삶”에 대한 감상쯤 한 마디 나눌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
소위 감정의 사치라는 거였을까?

한장의 편지를 쓰기 위해 열병(?)을 치르 듯하며,
난필로나마 내 생활, 내 마음을 가득 담은 편지를
따스한 입김으로 봉할 때,
나는 상대편과 아주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는 것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우체통 앞에서 쓴 주소를 다시 들여다 보고
가만히 손을 넣어 떨어뜨릴 때,
그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은 정성스레 키운 꽃 한 송이를
상대의 손길에 전하는 기쁨이 된다.

이 세상 천지 간, 나라는 인간을 속속들이 알고,
나 또한 그네들의 성품을 알며, 서로의 소식을 기다리며
기쁘게 받아 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소중한 이들에게 격조했던 시공(時空)의 간격을
편지라는 수단으로나마 한 치라도 좁혀보고싶고,
손바닥만한 종잇장에나마 짙은 정을 담아,
실로 혈맥(血脈)이 통하는 따스한 길을 만들고싶은 것이다.

내가 편지를 사랑한다함은 내가 편지를 쓸 수 있는 그 대상들을
사랑함이요, 잊지못함이요, 그리워함이다.
그러나 또 한긋 더 솔직히는 나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편지”를 아끼고 즐기는 자애(自愛)에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고 그런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만의 “짙은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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