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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 땅-1] 1980년대는 북-미주 이산가족찾기 활발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89년 ‘캐나다 조선’ 발행인으로 첫 방북취재··· 북한의 친척 찾아보려 했으나 평양 측이 불허

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내가 북한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84년 여름이다. 당시 캐나다 시민권자로 토론토 교포 일간지에서 기자(사업국장 겸직)로 근무할 때였다. 그때 한 잡지사와 총판 계약 건으로 LA를 다녀와야 했다. LA에선 하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다. 지난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민주 진영 선수 불참) 때처럼, 84년 올림픽은 공산 진영이 보이콧을 한 반쪽대회였다. 소련 및 대부분 동유럽 진영에선 선수단 파견 없이 위원들만 참가했다. 북한 역시 선수 한 명 없이 올림픽위원 4명만 시내 빌트모어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기왕 LA를 방문하니 이들 북한위원단과 인터뷰를 시도했다.

북한은 내 부모 고향이다. 북강원도가 고향인 외할머니는 해방 후 내가 서울에서 태어나자 38선을 넘어 외동딸 어머니를 잠깐 돕는다고 내려오셨다. 그 후 길이 막혀 영영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북에는 친오빠만 두 명 있었다. 남에 온 후 고향 생각하며 가끔 눈물짓던 모습을 기억한다. 외조모는 북에서 무척 가난한 환경이었고, 한글도 모르는 문맹자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여고와 전문학교까지 나온 인텔리에 속했다. 어머니 경우 타 지역에 거주하는 친척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재력가인 그 친척은 형제 없는 어머니의 어린 모습이 가엽게 보였는지 “네가 공부만 아주 잘 하면 서울 유학까지 보내주마”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도 합격하자 그 언약을 지킨 것이다. 어머니는 북강원도 이천군에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여자가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나온 경우가 많지 않던 시절이다. 교사가 된 어머니는 북한 도시로 발령받아 전전했다. 그때 외할머니도 함께 모녀가 옮겨 다녔다 한다.

북한 이산가족 만남. 첫 방북시 가운데가 캐나다 교포 A씨.
북한 이산가족 만남. 첫 방북시 가운데가 캐나다 교포 A씨.

부친 고향 역시 북강원도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대지주 집안(장남)이었다. 금강산 부근 회양군 중심으로 통천군과 철원군 일부 등 남의 땅 안 밟고 다닐 정도였다 한다. 서울 중심가에도 집이 두세 채 있었다. 6형제 중 장남인 부친은 고위공무원이었고 나는 서울 중구 한복판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친조부는 종로구 안국동에 살았다. 1950년 북의 돌연한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지자 정부 고위층이던 아버지와 형제들은 급히 남으로 피신했고, 친조부는 주변의 피난 권고를 무시하고 계시다 납북당하셨다. “나는 일제 왜놈 시대에도 살아남았는데, 공산당도 같은 동포인데 죄 없는 나를 어쩌겠느냐”고 계속 집에 머물다 인민보안서에 잡혀간 후 행방불명이 돼 버린 것이다.

지난 70년대 북한사람이란 한국인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한국 국적으로 북한인 접촉은 법적 허용조차 안 됐다. LA에서 나를 픽업한 잡지사 사장은 호텔에서 한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 내려주곤 쏜살같이 사라졌다. 호텔 라운지에서 그들과 1시간 남짓 인터뷰를 가졌다. 북 위원 3명은 온순한 인상의 마른 체구로, 악수 후 단 한 마디 입을 열지 않았다. 단장은 덩치가 크고 좀 험악한 인상이지만 친절했다. 대화는 단장 혼자 독점했다. 인터뷰는 당시 납북을 당해 화제였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부부 관련이 주 내용을 이루었다.

수년 후 토론토에 첫 방북 기회가 왔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해외동포 북한방문 허용’” 7.7 특별선언 직후였다. 이때는 주간지 ‘캐나다 조선’ 발행(겸 편집)인으로 뛰어다녔다. 미주교포일간지(뉴욕 조선/LA 한국/시카고 중앙일보) 역시 방북 취재경쟁이 한창이었다. 다음 해 89년 1월 토론토에선 나를 포함한 3명 교포가 평양을 처음 방문했다. 한 사람은 이산가족 A, 또 한 명 B는 비즈니스 목적이다. 나는 관광으로 합류했다.

평양고려호텔
평양고려호텔

우리 토론토 교포 3명은 베이징에서 조선민항(현재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 닿았다. 북에선 안내원(책임지도) 2명을 배정했다. 일행 중 B가 안 보여 한참을 밖에서 기다렸다. 알고 보니 겁에 질려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한 것이다. 안내원이 기내구석에 홀로 앉은 그를 달래서 데려왔다 한다. 안내원은 첫 방북 교포 중 비행기에서 못 내리는 교포들이 종종 있다고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잖아도 B의 행동이 좀 이상했었다. 그는 조선민항기 내에서 한 아줌마와 대화 중 한 칸 옆의 나를 가리키며 뜬금없이 “저 사람 조선일보기자예요” 했기 때문이다. 당시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모른 체 고개를 돌렸다. ‘정신 나갔나. 제 얘기나 할 것이지. 남의 신분은 왜 밝혀. 더구나 평양행 기내에서.’ 나중 인사하니 일본 총련 여성동맹 간부였다.(한국에선 조총련이라고 칭하나 일본에선 총련이라고 부름)

기자직업은 어디에든 기피 대상이다. 특히 공산국가에선 그렇다. 한번은 토론토에서 기자 신분으로 비자 신청(중국대사관)을 했는데 발급이 안 됐다. 평양행은 중국을 거쳐야 해서 중국비자가 필요했다. 토론토 중국총영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중국엔 왜 가느냐.” “목적지가 중국이 아니다. 평양 가는 데 베이징에서 하룻밤 자고 경유(transit)할 뿐이다.” “하루든 얼마든 어쨌든 중국에 머무니 절대 기자취재를 않는다고 각서를 써라. 그럼 비자를 주겠다”라고 해 응한 적이 있다. 이후 해외 어느 국가든 여행할 때 직업란에 기자라고 밝히지 않는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평양고려호텔에 묵었는데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첫 방북이라 북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 안내원은 이산가족 만남과 관광을 함께 병행하지 못한다고 한다. 북 관광총국 주관으로 7박 8일 관광만 준비했다는 것이다. 방북을 주선한 토론토에서 명확히 구분을 안 해준 탓도 있다. 속히 해결이 안 났다. “멀리 캐나다에서 처음 왔는데 가족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 A 가족을 못 만나면 우리 관광도 일절 취소하겠다”고 항의했다. 사실 그럴 생각이었다. 급기야 북측은 A 가족을 급히 수소문해 평양 출국 2일 전에 겨우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때 가족 만남을 거의 포기했던 A는 술만 먹으면 30대 안내원들에게 “야, x으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하며 주사()를 부렸다. B는 기겁하며 당황해했다. 안내원은 취한 A를 보며 “참 가관입네다”고 중얼거렸다.

평양 미술관
평양 미술관

하루는 한방 쓰는 B에게 짜증을 냈다. 나보다 8살이나 연상이다. “도대체 왜 그리 겁을 내는 거예요? 차라리 오지 말던가. 여기 무슨 비밀이나 잘못한 게 있어요?” “당신들 하는 말과 행동이 위태로워 그렇지. 잘못하면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다고. 나는 군대 생활도 미군 밑에서 카투사 근무를 했는데. 북에선 미군을 증오하니 그것도 불안하고...” 이 어처구니가 없는 B는 착하고 어질기만 한 교포였다. 고향 삼척의 형제 4명 모두 캐나다로 이민시켜 집안 기둥 역할을 했다. 그즈음은 정주영 현대 회장(고향 북강원도 통천) 역시 금강산개발 건으로 방북했을 때였다. 정 회장은 우리가 잠깐 탁아소를 방문하는 동안 고려호텔 2층에서 북한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정말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얼마 후 B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혼자 북을 자주 드나들었다. 북의 산삼(생삼) 등을 거래하는 첫 보따리 장사로 꽤 재미를 봤다는 소문이 들렸다.

해외이산가족 경우는 처음부터 해외동포위원회(해외영접국) 소관이다. 북에선 이산가족 명칭 대신 헤어진 가족 또는 흩어진 가족이라 부른다. 남북관계에서만 '리산가족'이라고 말한다. 북미 이산가족들은 80년대 초부터 1991년까지 약 10년 간 봇물을 이뤘다. 어느 교포 한 명은 북의 어머니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자 흥분해 가게를 남에게 맡기고 평양으로 달려간 경우도 있었다.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선 “매일 항공편이 없으니 며칠 기다리라”는 대도 사정사정해 이틀 후 화물기 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초창기이니 그나마 억지가 통하던 시절이다.

북한 평양 교통정리(2009년 8월)
북한 평양 교통정리(2009년 8월)

해외 이산가족 찾기 관련해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우리네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1980년대 이산가족 만남은 북한 어느 산골지역이든 고향 땅 방문이 가능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동네에 대형 TV 등도 기증했다. 하지만 이후 고향방문형식이 바뀌어 졌다. 친척만남장소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고향 아닌 임시 타지로 정해졌다. 오늘날에는 평양근교 해외가족 만남건물(면회소)이 따로 세워졌다. 당시 80년대 수많은 북미 이산가족들의 잦은 해후로 인해 북한 곳곳에선 사회문제가 일어났다고 들렸다. 한 예로 어느 북한가정의 아들친구는 6.25 전쟁 시 남으로 도주(피난)했다. 그 후 미국에서 돈 벌어 금의환향하듯 고향에 돌아와 환영받는데, 정작 아들은 인민군대에서 전사해 구차하게 살고 있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과거 한 때는 북한 최고의 결혼상대자는 북미이산가족이라는 얘기가 들렸다. 미화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미화와 북한 돈(원)과의 환율차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북에서 부모 친척을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방북을 않는 교포들도 있었다. 배우자나 주변 반대 등 여러 이유에서다. 내가 아는 한 교포는 “아, 어머니를 찾았다고 소식 왔어요. 이젠 됐어요. 나중 기회 봐서 가봐야겠어요. 요즘 사업이 너무 바빠서요.” “북한 상황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아요. 며칠이라도 속히 다녀오시지 그러세요.” 결국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약 1년여 뒤 비로소 방북 신청을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북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찾았던 가족 소재조차 불명이라고 전해 들었다. 이런 교포 경우를 나는 두세 번 목격했다. 꼭 이산가족뿐이 아니다. 무슨 목적이든 북한에 비자를 신청해 놓고, 비자발급이 승인된 상태에서 특별이유 없이 방북을 취소하는 경우 차후의 북한행은 거의 성사되기 힘든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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