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기본소득이 정치권의 중심 화두로 떠올랐다. 대선주자 급을 비롯한 여야 거물 정치인들이 잇따라 기본소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주된 의제로 등장했다. 특히 국민 상당수가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을 통해 현금성 복지의 단맛을 체감한 터여서 차기 대선을 준비하는 정치인이라면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리얼미터가 최근 실시한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도 찬성 48.6%, 반대 42.8%로 비록 오차 범위 내였지만 찬성이 다소 많았다.
 
기본소득이란 재산이나 소득은 물론이고 노동활동 여부에 관계없이 국가가 국민 모두에게 일정액의 생계비를 정기적으로 균등하게 지급하는 제도다. 그동안 이 제도는 황당하고 실현 가능성이 낮은 좌파 몽상가들의 철없는 주장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우파 경제학자들조차 이 제도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도입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이다. 그가 지난 3일 ‘배고픈 사람이 빵을 먹을 수 있는 물질적 자유 확대’가 정치의 목표라며 기본소득 도입을 공론화하자 2015년부터 기본소득의 의제화를 시도해 온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경기지사가 적극 호응하면서 이슈로 부상했다. 뒤이어 대선주자 선호도 1위인 이낙연 민주당 의원까지 “기본소득제의 취지를 이해하고, 그에 관한 찬반 논의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순식간에 정치권 담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급부상한 것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IoT), 로봇 등과 같은 기술혁신으로 야기될 일자리 감소와 소득격차 확대에 대한 위기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예컨대 인공지능이 대다수의 일자리를 빼앗기 시작하면 인간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할 소득이 인공지능 등과 관련된 소수의 첨단기업과 종사원들에게 집중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자본주의가 붕괴 위험에 직면하게 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금액을 나눠주는 기본소득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제조업 중심 국가이기 때문에 제 4차 산업혁명 기간 중 대량실업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사회안전망이 취약하고 기존 복지제도도 과다한 행정 비용 등으로 체감 만족도가 무척 낮아 기본소득에 대한 유혹이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 경제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창업을 원하는 청년들로 하여금 기본소득이라는 안전판을 배경으로 과감히 스타트업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마력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국민연금 등 기존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 도입의 가장 큰 걸림돌은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복지선진국에서 이 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국민에게 준다는 특수성 때문에 복지 대상자 선별하기 위한 심사가 불필요해 복지관리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시행되고 있는 사회보장제도를 기본소득 하나로 통합할 경우, 별다른 추가 부담 없이 시행이 가능하거나 복지비용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제도가 빈약해 복지 선진국과 처지가 사뭇 다르다. 월 50만 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연간 무려 300조 원이 필요하다. 올해 정부 총예산의 60%에 가깝고, 보건·복지·고용 부문 예산 180조 5000억 원을 훨씬 웃도는 비용이다. 대규모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조세부담률을 10%포인트 높이면 1년에 세금을 200조원 거둘 수 있으나 어느 누가 이것에 동의하겠는가. 또한 기본소득이라는 공돈을 받게 될 경우 노동자들의 근로 의욕 감소로 사회 전체의 생산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현 시점에서 기본소득 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판단이다. 그런데도 기본소득이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 사태로 인해 현 경제 시스템의 취약점이 너무나도 크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주요 후보군들 사이에서 세출 조정이나 증세, 국채 발행 등 백가쟁명식 재원조달 방식이 봇물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실현가능성이 없는 신기루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기본 소득을 공약으로 채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기본소득이라는 미래 의제가 표심을 얻기 위한 일회용으로 사용되고 버려지지 않을 까 심히 우려된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