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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1).jpg

 

                                                     

 


대원군은 겸손한 말투로 구차하게 변명 하였다 . 전국 여러 곳을 돌아 다니다 보니 임금에게 문후조차도 제대로 드리지 못 한것을 백배 사과 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임금도 아버지에게 변변하게 소식도 알아 보지 못하고 무심히 있었던 것이 미안하다고 답변하였다 .

대원군은 임금에게 인사를 마치고 중전에게도 찾아 가 뵙고 오겠다고 보고 하였다 .
임금은 중전 보다도 대왕 대비께 인사를 먼저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 하였다 .
이하응은 대왕대비 찾아 뵈라는 임금에 말에 찾아 볼 생각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
대왕대비는 자기에게 한때 대권을 맡기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동안 대왕대비는 자기가 그동안 저지른 실정에 대하여 좋은 눈으로 보아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자기가 권좌에서 물러 나게 부추긴 사람 중에 한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대비전은 뵐 면목이 없습니다 . 대비전에 보고도 없이 국정을 소흘히 하고 방랑생활을 한 주제에 무슨 낯으로 뵙겠습니까? 차라리 의금부 밖에 나가서라도 석고 대죄하겠나이다"
석고 대죄란 거적을 깔고 엎디어 처벌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
도저히 납득이가지 않는 짓을 대원군이 저지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있으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줏어 먹고 있어야 할 사람이 마치 정치의 주역 이라도 다시 되기라도 할듯이 석고 대죄를 한다니 말이다 .
그것도 의금부 문 밖에서 상투 머리를 풀고 처벌을 바란다니 정말 웃기는 얘기였다 .

중전 민비가 소식을 듣고 안상궁에게 시아버지인 대원군이 하고 있는 짓을 알아 오라고 지시 하였다

"마마, 대원군께서는 문후차 중전 마마를 뵈우러 오신다는 것을 ,전하가 대왕대비를 먼저 뵈고 오라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대원군께서는 대왕 대비전에는 안가시고 의금부에 나가셔서 석고 대죄를 청하고 계시다합니다 "
"무슨 죄를 지었기 석고 대죄를 드린다고 하드냐?"
"주상 전하 보필의 막중한 소임을 저바리고 나랏 일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돌아 다니다가 갑자기 나타 났으므로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죄를 청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의금부 앞에서 대죄를 청하신다는 말이냐?"
".............."
"의금부라면 제일 번화한 종로 네거리가 아니더냐?"
" 그러하옵니다 "

(흥, 대궐 안 적당한 장소에서 얼마 든지 석고 대죄 할 장소도 많건만, 종로 네거리에서 그것도 의금부 앞에서 ..... )
민비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띄웠다
( 전하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들어 오시더니 쑥스러웠던 모양이군 .... 나는 그분의 의도를 잘안다 . 종로 네거리에서 백성들에게 무엇을 보이려고 하는지.....)

민비는 대원군이 시아버지이기 이전에 대원군의 평소 꼬인 성격에 대하여 속으로 무척 혐오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

민비는 대원군에 대하여 평소 믿지 못할 소견을 갖고 있었다 .
한마디로 그녀가 생각 하는 대원군은 그동안 그가 해 왔던 정치 과정을 볼때 잘 알수 있었다 , 그는 자기와 자기 심복 이외의 모든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 하는 성격에다 무슨 일을 하던 본심을 들어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심을 잘 들어 내지 않는 사람은 대개 교활한 성격이던가 아니면 머리가 나쁜 사람이 분명하다 .
하지만 대원군은 머리가 아주 나쁜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현상을 교묘 하게도 이론화 합리화 쳬게화 하는데는 명수이며 무슨일이든지 흑백 논리화 하여 편가르기 선동 정치에는 명수이었기 때문이었다 .

중전 민비가 생각 하는 정치인 대원군은, 그가 그가 지내온 과정을 보면 잘나타나있다 .그가 무슨 일을 추진할때는 마치 무당들의 굿판 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
그 예로 한때는 자기를 밀어 주었던 백성들을 배신하고 백성들로 부터 막대한 세금과 노역을 요구한것도 그랬고 백성들의 교육기관인 서원 마저 가차 없이 깡그리 없애버린 것도 그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겉으로는 항상 원칙만 찾 다가도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하여는 뜻 있는 선비들을 모독하고 나라의 기본법인 대전회통 조차 무시하고 원납전이니 결두전이니 통과세니 하는 불법을 자행하는 모습도 서슴치 않았다 .
정치인 대원군의 얼굴을 보면 지금까지 해온 과정을 볼때 그가 노리는 그의 장래가 훤히 보인다 .
중전은 대원군이 온갖 풍상을 겪은 장본이라는 것을 누고 보다도 잘 알고있다 .
중전은 평소부터 대원군의 얼굴에는 복수심으로 가득찬 한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예로 대원군은 무슨일을 하든지 자기가 목적 하는 일이 일에 방해가 될때는 되지도 않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서슴치 않을 뿐만 이니라 걸핏 하면 싸움패 기질을 가진 어투로 파락호 시절의 본색을 서슴치 않고 들어 내는 것이 싫었다 .
중전 민비는 대원군이 시아버지 이기 이전에 ,인격자로서는 영점에 가까운 인간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

중전 민비는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
민비가 대원군을 평가 절하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
그것은 중전의 친정 오라버니와 어머니 집의 폭발 사건을 뒤에서 조종 하고도 뻔뻔스럽게 양심을 속이고 시침이를 떼는 시아버지 대원군 , 아니 인간 이하응이가 가증스러웠다던 것이었다 .

이것은 중전이 오직 믿고 있는 민씨 일가에 대한 도전이 분명했다 .
아니 선전 포고 일른지도 모른다 .

밖으로 돌아만 다니던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고 말겠다는 망상을 영특한 중전이 놓질리가 없었다 .

대원군이 다시 권토 중래 하려고 무턱대고 대궐에 입성 한 것은, 영특한 중전,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 , 대원군에게서 이미 마음이 떠난 대왕대비 , 고종 친정체제로 바뀌어진 조정,등이 이미 너무나 굳게 다져저 있는것을 대원군은 마치 별거 아닌것 처럼생 각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그의 큰 오산이었다. 조정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
대원군이 아직도 조정을 예날 조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보통 끔직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
그는 고종의 친정 체제의 조정 분위기를 너무나 얕본것이다

대원군은 다음 단계로 석고 대죄를 풀고 대궐로 들어가서 중전을 찾았다 .
마음에도 없는 의례적 방문이었다
" 중전마마 , 그동안 나라일을 살펴 드리지 못한 동안 옥후가 강녕하신지요?"
"예 그동안 별일은 없었습니다 "
"별일이 없으시다니 감축 하옵니다"
중전과 대원군의 인사는 이렇게 의례적으로 끝났다 .

국내사정이 이렇게 돌아 가고 있는동안 이웃나라 일본`의사정은 급박히 돌아 가고있었다 .
음력을 없애고 양력을 사용하였으며 징병 제도화 하여 국방력을 강화 시키었다 .

실력이 든든해지자 일본 조정에서는 소위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 되었다 .
이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자는 육군대장 서향융성, 외무성 외무경, 복도 중신, 등이었다 .
이렇듯 일본국이 조선을 놓고 요리 할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조선에서는 친정을 선포한 청년 임금 고종과, 영특한 민비와 , 이제는 물러 나 있어야 할 권력의 욕심 많은 대원군이, 깊은 꿈속에서 깨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

부산 초량에는 태종 때 부터 일본인들이 장사 할수 있는 포구를 허락한 왜관이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 왜관은 일본인이 장사를 할 수 있게 조선의 조정에서 부산포와 제포에 세워 주었던 곳으로서 접대처ㆍ무역처ㆍ유숙처ㆍ외교 교섭처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 공관이 있었다.
왜관 내에는 연대청, 동관, 서관 객사 등이 있어 일본인과의 교역에 필요한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곳은 왜인들이 무역 거래를 일삼는 제한 구역이자 우리 나라 쪽에서 그들을 접대하는 지정 장소가 됐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 나라와 일본이 외교 문제를 협상 하는 중요한 외교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왜관은 달리 말하자면 상관(무역회관)이기도 하고 때로는 외교 공관이 되기도 하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던 장소였다.

부산에 건너오는 일본 사신과 그 일행은 모두 왜관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이 왜관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대마도 도주의 특송사는 110일, 각종 세견선을 타고 온 일본인은 85일, 각종 차왜는 55일로 되어 있었다,

부산 의 5월은 푸른 바닷 바람과 함께 봄이 찾아온다 .5월의 바닷 바람은 바닷향기를 품고 훈풍을 타고 바다의 배의 쌍고동 소리가 퍼진다 .
일본배가 왜관에 자주 드나 들며 생긴 새로운 풍경이다 .
이 부산항에 5월25일 전에 보지 못하던 거대한 기선이 나타났다.
이른바 춘일호, 운양호, 제2정묘호라고 불리우는 배였다.

보통때는 얼씬도하지 않던 동래부사 황정연과 부산훈도 현석현이 모처럼 초량 왜관을 들린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일본의 조선국 사사(使事) 삼산무(森山茂...모리야마)가 부산훈도 현석운을 만나자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
부산 훈도 현석운은 왜관 관계 사무를 맡고 있던 우리 나라 관원이었다.
왜관 관리 사무소에는 접위관(接慰官), 차비관(差備官), 훈도(訓導), 별차(別差), 문정관(問情官) 등의 공무원들이 있었는데 사실상의 주요 업무는 거의 훈도가 처리 하였다 .

현석현의 소개로 일본인 삼산무와 황정연과 서로 통 성명하였다 .
현석훈이 먼저 삼산무에게 말을 꺼냈다.
일본인 삼산무가 외교 문제로 먼저 말을 청하려 하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현석훈이 성급히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
"왜 오늘 동래부사 영감님 까지 여기 나오시게 된 이유를 모리야마께서 아시오?"
"글세 올시다"
"글세라니? 일본국은 남에 나라에 허가도 없이 군함을 세척이나 끌고 입항해도 괜찮다는 말씀이오?"
" 상선이기 때문에 중국에 가는 길에 잠시 우리 왜관에 들려 본것 뿐입니다 "

" 저 배가 어디 상선이오? 빗죽 나온 저것이 대포가 분명한데 대포가 아니라는 말이오?"
"아. 그것 말씀입니까? 저배는 우리 일본에서 만든 배가 아니고 영국에서 사들인 배이기 때문에 군함을 상선으로 개조 하면서 기술적 문제로 미처 아직 제거를 못했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교활한 삼산무가 둘러 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게 못쓸 대포인지, 아닌지 누가 증명하겠소?"
"정 그러시다면 내일 깨끗히 물러가겠습니다 "
"당장 물러가시오"

사정에도 불구하고 세척의 거대한 군함은 스스로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

그런데 물러나가던 일본배들은 절영도를 빠저 나가자 쓸모 없다던 대포로 부터 무인도를 향하여 요란하게 함포를 쏘아 대기 시작하였다
동래부사 황정연은 깜짝 놀랬다
"여봐라 이 대포 소리가 어디서 나는 소리냐? "
" 돌아가는 일본 배가 무인도에다 대고 함포를 쏘고 있습니다 "
"무엇이?"

황정연이 어제 일이 생각났다 .
일본인 삼산무가 분명히 고장 난 대포라고 한 것이 거짓이었음이 들어 난 것이었다 .
"허....큰일 날 놈들.... 그런데 저놈들이 ...... 중국으로 간다고 항로는 바꾸었다지만 과연 ...?"
순간 동래 부사 황정연은 겁이 더럭났다
어제 일본 기선 세척이 항만에 들어 왔던 사실에 대하여 조정에 보고 하는 것을 묵살 하려 했는데 혹시 중앙에 보고 하지 않했다가 어떤 일이 돌아올지 보고를 않을 경우 몰라 돌아 올 후환이 걱정이 되었다 .
그래도 보고 해 두는 것이 나을성 싶었다 .
황정연은 어제 일을 소상히 적어 고종에게 장계를 올리었다 .
고종은 장계를 보고 노하였다 .

국교도 없는 왜놈들이 허가도 없이 남의 항구에 들어 왔다는 것도 그냥 묵과 할수 없는데 군함을 상선으로 알고 보냈다는 대목과 배가 떠 날때 절영도 부근에서 함포 사격을 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
"도대체 동래부사 라는 자가 정신 있는 자야? 일본놈들 속임수에 그냥 놓져 버리다니...."
"..............."
"황정연을 파직하라"

동래부사를 파직 하였으나 앞으로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도 불안 하였다 .
이와 같은 임금의 근심은 현실로 나타났다 .
일본배 세척중 한척인 운양호가 일본으로 돌아 가지 않고 서해안으로 가고 있다는 첩보 보고가 들어왔다 .
운양호는 강화섬 동남방 난지도 부근에 선체를 들어 내었다 .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8월 20일이었다 .
배의 닻을 내리고 해안 포대를 살폈다 .
대안 포대가 조용하였다 .
"지금 부터 보트로 선발대가 상륙하여 포대를 폭파하고 난 다음 함포 사격을 한다 .그다음 상륙한다 .모두들 각오하라"

보트는 빗속에 해안선을 향하여 미끌어저 들어갔다 .
이쯤 되면 조선 해안에서 반응이 있을것 같은데 아무 반응이 없다 .
"비가 오니까 조선놈들이 모두 방에 들어가 낮잠만 자고 있는 모양입니다 "
"쉿 조심해"

이때였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대안 조선 포대에서 불을 뿜기시작했다 .
"뱃 머리를 돌려라"
혼비 백산한 일본 해군이 뱃머리를 돌려 모선으로 돌아왔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대항이 이렇게 강한줄 몰랐다 .
이상한 배가 팔미도 근방에 나타나 강화도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강화유수 조병식이 듣자 중군 이기혁에게 명하여 광진 , 덕진, 초지진에 경비 명령을 내려 놨던것이다 .
운양호 함방 이노우에는 여기에서 물러 날 사람이 아니었다 .
다음 날 강화도와 영종도 사이에 닻을 내리고 강화도를 습격을 하기로 하였다 .

습격 하는척 하면서 조선군이 들어 낸 포대 일본 함포가 조준하고 있었다.
일본 배에서 먼저 초지진 포대에 함포를 쏘았다 .조선군도 운양호에 포를 쏘아대었다 .
그러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었다 . 일본 해군이 쏘는 포탄은 정확히 이쪽에 와서 명중 하는데 저쪽 에다 대고 쏘는 대포 알은 도중에서 물에 떨어지기만 하였다 .
얼마 안가서 승부는 결정이 났다 .

다음날 일본군은 점령하기 쉬운 영종도에 상륙하 였다 영종진 첨사 이민덕의 수비 병력을 격파 해 버리었다 .
이민덕은 섬을 빠저 나와 도망을 치었다
조선군 35 명이 전사하고 생포가 16명이나 되었다 .대포가 36문이나 약탈당하였다
이 패전 사실이 고종에게 보고 들어갔다

고종은 마음이상했다 .
"도대체 35 명이나 병사들이 죽었는데 첨사라는 작자는 섬을 빠저 나와 도망을 쳐?"
우의정 김병국이 업드려 말한다
"우리나라 포와 일본의 포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 새로 바꿔야 합니다 "
"영종진 첨사를 잡아다가 곤장 백대를 치어 전라도 나주목으로 보내 벼슬을 박탈하여 병졸로 종군케하고 영종도와 강화도는 경기감사와 강화유수가 직접 지키게 하라"
한편 운양호 사령관 이노우에는 승리의 선물을 갖고 의기 양양하게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개선하였다 .

영종도를 지키지 못한 영종도 첨사 이민덕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지난 날 대원군이 강화도에서 어쩌다 승리 했던 미국이나 프랑스 상선에 대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군비를 너무나 소흘히 해 왔었다는 사실이었다 .
대원군은 어쩌다 양인들을 몰아내고 기고만장하여 척화비라는 비석을 세워놓고 기염을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
대원군의 국방관(國防觀)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것이었다 .
그가 각처에 세운 척화비라는 것에 그 내용이 잘나타내고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 하는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즉 화의를 하자는것이다 .그들과 화의와 평화를 주장하는것은 나라를 팔아 먹는것이다 . 우리 자손 대대로 경계하기 위하여 병인년에 이글을 새기고 신미년에 세우노라 "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 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프랑스와 미국의 상선과 싸워 어쩌다 승리 한번 한것을 가지고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라는것을 세워놓고 과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중국에 나와 있던 서양의 상선 한두척을 격퇴하고 자만하면서 이것을 핑계로 군비로 쓰겠다고 걷은 세금을 모두 경복궁 짓는데 쏟아 부었으니 대포하나 제대로 된 것을 장만 하고 있을리 만무였다

그러한 대원군의 군비 소흘은 곧바로 고스란히 고종에게 넘어왔다 .

그당시 일본의 운양호 하나만 보더라도 영국 해군이 쓰던 배로 길이가 열아홉자요 폭이 스믈 넉자에다 배수량이 245톤이었고 104마력에다 75명이나 태울수 있으며 증기기관이라는 동력을 갖고 있는 최신군함이었다 .

운양호는 영국의군함을 조급 개조 하였을 뿐이었다 .
이사건은 내용을 모르는 백성들은 고종을 걱정스럽게 바라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백성들은 대원군시대 미국과 프랑스 상선을 격파하고 환호했던 기억을 잊지 못하였던 것이다
대원군시대의 서양 사람들의 상선과 일본 군함과의 전투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전투 였는데도 말이다 .
백성들의 눈과 입을 막고 큰소리치던 대원군은 조선의 백성들을 완전히 어리석은 백성들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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